우리가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은 모두 두뇌 동작에 의해 이루어진다. 중풍이나 치매 환자를 보면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다리가 멀쩡해도 두뇌의 운동중추가 망가지면 걸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만물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컵도 물을 담는 목적이 있고, 연필도 글을 쓰는 데 사용되는 목적이 있다. 그럼 인간 두뇌의 동작 목적은 무엇이겠는가? 생존과 번식이다. 두뇌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작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내 두뇌도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동작한다. 그런데 70대 중반인 내 두뇌도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동작해야 하나?
양로원의 노인들이 만나면 맨날 하는 이야기가 어제 자식들이 다녀가고 용돈 준 이야기와 왕년의 자기 자랑 뿐이라고 한다. 감히 나에게 덤비지 말라는 두뇌의 생존 목적에 따라 동작하는 것이다. 그러다 암에라도 걸리면 서울의 명의를 찾아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두뇌의 생존 목적에 따라 동작하는 것이다.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번식을 위해 섹스를 추구하고,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돈과 권력을 추구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찾아다니며, 사회적 관계망을 든든하게 만들기 위해 친구를 찾아다니는 것이 좋은 삶일까? 그렇게 살아야할까?
제발 내 두뇌는 그렇게 동작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나 두뇌에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지 않으려면 알아차려야 한다. 지금 여기 두뇌 신경망의 동작을 알아차려야 프로그램대로 동작하지 않을 수 있다. 자랑하는 순간 “내 생존을 위해 감히 덤비지 말라고 자랑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무의식적으로 동작하는 프로그램을 멈출 수가 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두뇌에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지 않으려면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리고 멈추면 평온하다. 감정을 일으키는 변연계의 동작을 멈추게 하므로 순간순간 알아차림에 머물면 언제나 평온하다.
언제나 알아차림에 머물면 좋으련만 인생이 그렇게 살 수 있겠는가? 알아차리고 멈추면 다음으로 무엇을 해야 좋을까? 매슬로우는 삶의 가장 높은 가치를 자아실현이라고 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하면서 더 나은 자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자아를 실현하려면 먼저 자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뇌과학에서 자아(Self:나)는 두뇌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18개월 ~ 24개월 이전의 아기는 ‘나’라는 것이 없고, 두뇌가 망가진 성인 중에서도 ‘나’라는 것이 없다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나’라는 것은 가변적이다. 대학 다닐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따라서 불변의 ‘나’라는 것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즉 무아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현할 자아가 없는데 어떻게 자아실현을 하나?
우리 두뇌는 순간순간 ‘나’라는 것을 만들고 그것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작한다. 매순간 ‘나’라는 프로그램에 따라 동작한다.
‘나’라는 것에 갇히지 않고 순간순간 알아차림에 머물면 언제나 평온하리라. 만약 알아차리고 프로그램을 멈춘 후 다른 프로그램을 수행해야 한다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