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나라야마 부시코”라는 영화를 보았다. 옛날 산골의 가난한 마을에서 일어난 고려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 마을에서는 70살이 넘으면 고려장을 했다. 주인공 할머니는 70이 넘어 아들의 지게에 얹혀 산신이 산다는 고려장 터로 갔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아들을 빨리 돌아가라고 손짓한다. 반면 다른 할아버지는 온몸이 묶여 아들 지게에 실려오는 내내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다. 이제 70이 넘은 노인이 되니 주인공 할머니처럼 손 흔들며 갈 수 있도록 짊 뿐만 아니라 마음도 정리해야겠다.
나이가 들면 몸도 쇠퇴하지만 많은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주위에 치매 걸린 부모의 재산을 두고 형제간 싸움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약삭빠른 자식이 치매걸린 부모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면서 인감을 발급받아 부모 재산을 자신에게 이전하여 형제간 칼부림이 나기도 한다. 치매가 걸리면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할 수 없어 생기는 문제다.
병문안으로 노인들이 사는 요양원에 가보면 아무리 늙어도 여기는 오지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로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사람이 전국적으로 75만 명이 되고,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년 14조원으로, 국가 예산의 상당부분에 이른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낸 세금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생각해보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늙으면 몸만 퇴화하는 것이 아니라 두뇌도 퇴화한다. 두뇌가 퇴화하면 소위 어린애같이 되는 현상이 생긴다. 얼마 전 위안부 사건을 두고, “저 할머니들은 죽지도 않나?” 하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이 분은 학교 다닐 때 우리의 우상이었는데. 부모님들로부터 “제발 너희들 S처럼만 해라?”하고 귀가 따갑도록 이야기를 들은 우상이었는데. “제발 저렇게는 늙지는 말아야지” 하고 두손모아 기도해 본다.
두뇌가 퇴화하면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화된다. 그래서 선진국에서 보면 노인들이 극우화되는 현상이 생긴다. 노인들이 많으면 정치는 극우화되어 세대간 갈등의 원인이 된다. “이제 투표도 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결심해 본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인데, “내가 결정하고 너희가 살아라” 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권리만 행사하고, 내가 책임지지 않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 자식들에게 짐만 된다. 그래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거나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으면 자연스럽게 갔으면 한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아 문제다.
사람들은 사전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면 모든 것이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사전의료의향서가 있어도 병원 응급실에 실려가면 산소호흡기와 ECMO를 꼽는다. 한번 꼽은 산소호흡기는 의사도 제거할 수 없다. 살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소호흡기를 단 체로 몇년을 가기도 한다.
스위스같은 나라는 조력사가 있어 주사 한방으로 죽을 수 있다니 부럽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언젠가 도입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도입되더라도 조력사 조건이 엄청 까다롭다. 사람을 죽일려고 주사 주고 싶은 의사가 누가 있겠는가? 그래서 우스개로 죽을 때가 되면, 추운 겨울날 독한 위스키 한병 들고 산으로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