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풍환자가 반신불수가 되거나 말을 못하는 것을 두고 옛날에는 ‘전생에 죄가 많아서 그렇다’고 하였지만, 현재에는 두뇌의 동작 때문임을 안다. 두뇌 신경망에 있는 혈관이 터져 신경세포를 죽이거나, 혈관이 막혀 신경세포가 죽을 수 있다. 이런 경우 죽은 신경세포가 담당하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 신경망이 운동중추이면 반신불수가 되고, 언어중추이면 말을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운동이나 언어뿐만 아니라 감각이나 생각도 두뇌의 동작에 의해 이루어진다. 편도체가 활성화되면 화가 나고, 보상중추가 활성화되면 행복감을 느낀다. 생각도 마찬가지다. 두뇌가 동작하고 그것이 언어로 매핑되면서 의식되는 것이 생각이다.
우리의 두뇌는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작한다. 무엇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나(self)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나’라는 것도 두뇌가 만든 것이다. 두뇌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나’라는 것을 만든 것이다. 어릴 때는 ‘나’와 세상도 구분할 수 없지만 18~24개월 정도 되면 ‘나’와 세상을 구분하기 시작하면서 ‘나’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고무손 실험을 해보면 ‘나’라는 경계가 변하기도 한다. 고무손을 내손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어떤 환자는 내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나’라는 것도 두뇌가 만들었고 가변적이라는 이야기다. 불변의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노인이 된 나는, 내 두뇌가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라는 것에 갇혀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늙어서도 번식을 위해 바람피우는 것도 꼴볼견이고, 죽을 병에 걸려 회복 불가능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살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도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게 된다.
세상 만물은 변하게 되어 있다. 늙으면 몸의 여기저기에 고장이 생기게 마련이고 두뇌도 퇴화되기 마련이다. 기억력도 옛날 같지 않고 판단력도 흐려진다. ‘내가 왜 이런가’ 하고 한탄해 보아야 고통스럽기만 하다. 받아들이며 관리하며 살면 된다. 그러다가 자력으로 살아갈 수 없게 되면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어디에도 갇혀 살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