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 산다는 것은 두뇌 신경망에 프로그램된 대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알파고가 훈련된 대로 바둑만 두는 것은 바둑에 갇힌 것이다. 알파고가 바둑만 둘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통역을 해야 한다면 오동작을 하게 되고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 훈련받은 대로,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는 것을 갇혀 산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1950년대에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랐다.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랐고 서당에 다니기도 했다. 그래서 제사에 대해 교육을 받았고, “제사를 잘 지내야 집안이 잘 될 수 있다”고 배웠다. 이렇게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에 제사의 중요성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옛날 명절 제사는 큰집을 비롯해 여러 집을 다니면서 함께 지냈다. 여러 집 제사를 지내고 우리 집에 오면 점심 때가 되었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수십 명이 식사를 함께 했다. ‘기제사’라고 해서 돌아가신 조상의 제사를 지낼 때에는 며칠 전부터 스텐 그릇을 꺼내 양잿물로 닦고, 제사상은 “조율이시”의 규칙에 따라 제사상을 차리고, ‘도포’라는 의복을 입고 제사를 지낸 후 ‘음복’을 하고 나면 새벽이 되었다. 다음 날은 음식을 동네 집집이 나누어 주었고, ‘고시레’라고 하여 짐승이 먹을 수 있게 음식물을 울밑에 두기도 했다.
나는 이런 제사 풍습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았는데, 1970년대에 한국에 인터넷을 도입하기 위해 미국,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그 당시 한국의 현실과 비교하여 이런 선진국은 너무나 잘 살기에 이들은 제사를 아주 잘 지낼 것으로 생각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 보았다. 아시다시피 이들은 제사를 알 리가 없었고, 그 당시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사도 안 지내는 사람들이 이렇게 잘 사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외국에 나갈 기회가 없었다면 유교의 제사라는 프로그램에 갇혀 살았을 것이다.
옛날처럼 여자가 집안 일에 전념할 때는 이런 제사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요사이처럼, 여자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생활도 해야 하는데, 옛날처럼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 큰 갈등을 겪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제사 뿐만 아니라 세상 무슨 일이든 그 속에 갇혀 살 수도 있다. 이 경우 환경이 변하지 않으면 옛날처럼 살 수도 있지만, 지금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내 신경망에 프로그램된 대로 살면 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알파고가 통역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따라서 때로는 신경망에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지 않고 다른 형태로 반응할 필요가 있다.
프로그램된 대로 살지 않고 다른 반응을 하려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이 자신이 갇혀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자신이 갇혀 있음을 알아차려야 변화가 가능하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면 어디에도 갇혀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 두뇌는 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작한다. 그런데 나라는 것도 두뇌가 만든 것이다. 70세가 넘은 나같은 노인도 생존과 번식에 갇혀 살 필요가 있나? 노인이 두뇌에 프로그램된 대로 생존과 번식에 갇히면 살려고 발버둥치게 된다. 살려고 발버둥치면 식물인간이나 치매상태로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어 자식과 사회에 큰 부담을 줄 수도 있다.
‘나’라는 것도 두뇌가 만든 것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두뇌도 자연법칙에 따라 퇴화하고 와해되게 되어 있다. 90살을 살면 성공이고 80살에 죽으면 실패인 것도 아니다. 100세가 넘어서도 자력으로 살 수 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70살에도 자력으로 살 수 없는데 살려고 발버둥치면 자식과 사회에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노인이 된 내 두뇌가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동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라는 것에도 갇혀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