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은 두뇌 동작의 결과이다. 중풍 환자가 반신불수가 되거나, 말 못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생각도 두뇌의 동작이고, 느낌이나 감정도 두뇌 동작에서 나온다.
이러한 두뇌 신경망은 태어나면서 타고 나는 것도 있지만, 자라면서 만들어지고, 평생을 살면서 바뀌기도 한다. 생명현상을 담당하는 뇌간과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의 일부는 타고 나지만, 대부분이 25세가 되기 전까지 자라면서 만들어지고, 이렇게 만들어진 신경망으로 우리는 평생을 산다.
일부 신경망은 새로 생성되기도 하고, 변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신경망은 25세 이전에 형성된다. 그래서 육아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육아를 한다면 먼저 “내 자식에게 어떤 신경망을 만들어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 다음으로 “어떻게 하면 그런 신경망을 만들어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아이를 키워야 한다.
인간의 지능을 컴퓨터로 구현하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시도되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작성하여 인간의 지능을 구현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공지능도 인간 두뇌와 같은 구조로 신경망을 구축하고, 프로그램을 짜는 대신 빅데이터로 훈련시키니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옛날에는 훈련할 빅데이터가 없었지만 이제 인터넷에는 무수한 서류, 논문, 이미지, 음성, 동영상이 널려있다. 이러한 빅데이터로 인공지능을 훈련하니 알파고가 등장하여 이세돌을 이기고, 이제 인간은 알파고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챗GPT의 등장은 알파고처럼 바둑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고 앞으로는 어떤 분야이든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할 전망이다. 그것이 글을 짓는 일이든, 변호사 일이든, 의사 일이든,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작곡이든, 어떤 분야에서도 인공지능이 인간을 능가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세상의 인간들이 만든 다양한 정보로 훈련하였으니, 인간보다 훨씬 많이 기억하고 처리속도도 인간보다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창의성을 정보의 조합에서 나온다고 보면 인공지능의 창의성도 인간 못지 않을 것이고, 인공지능은 인간의 감정도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인공지능과 무엇이 다른가? 인공지능은 훈련된 대로 동작한다. 훈련받은 빅데이터에 포함되지 않은 환경에서는 무용지물이 된다. 알파고는 바둑에서 인간을 능가하지만 통역이나 자율주행차의 운전에는 무용지물이다. 그러면 “알파고에 통역기능과 자율주행 같은 다양한 기능을 추가하면 되지 않는가?”하고 생각하겠지만, 다양한 기능을 추가해도 언제 바둑을 두고 언제 통역을 할 것인지 문제가 된다. 즉 인공지능 위에 인간이 있어서, 언제 바둑을 두고, 언제 통역을 할 것이지를 지시해야 한다. 그러면 인간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인간 위에 신이 있어 제어하는 것이 아니다. 의식이 있어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의식의 핵심 기능이 알아차림이다. 현재 동작하고 있는 신경망을 알아차리면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인공지능은 훈련받은 프로그램대로만 동작할 수 있지만 인간은 현재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으므로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 즉 알아차리면 습관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반도체로 만들어진 인공지능은 의식을 가질 수 없으므로 언제나 훈련받은 대로, 프로그램된 대로만 동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신경세포로 만들어진 인간의 두뇌는 의식을 가질 수 있으므로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지 않을 수 있다. 알아차리면 변화가 가능하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의식은 어떻게 진화하였나? 인간의 두뇌는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동작하는데, 생존과 번식을 위해 예측모델을 사용한다. 즉 살아오면서 축적한 정보를 기반으로 미리 환경의 예측모델을 만들고 오감을 통해 들어온 정보로 이를 수정하면서 반응한다. 오감을 통해 입력된 정보를 처리하여 반응하면 늦다. 이렇게 반응하면 야수는 타자가 친 공을 잡을 수가 없다. 타자가 공을 치는 순간 공이 날아올 방향을 예측하고 뛰어가면서 수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동작하는 신경망에서 의식이 생긴다.
두뇌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도 이처럼 예측모델로 동작하지만, 자신의 신체에 대한 내부모델도 만든다. 머리의 위치, 위장의 상태 등에 대해서도 시뮬레이션 모델이 두뇌 신경망에서 돌아가는 것이다.
신체의 내부모델이 동작하는데, 여기에 의식이 생기면 우리는 “나(self)”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나란 이렇게 두뇌가 만든 것이며, 고무손 실험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내부 모델에 변화가 오면 신체에 대한 감각도 변하는 것이다. 즉 나란 것도 감정, 생각, 언어, 행동과 마찬가지로 두뇌가 만든 것이며 가변적인 것이다.
이렇게 동작하는 두뇌는 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평생 동작한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두뇌로 해석한다. 두뇌 신경망이 다르면 당연히 세상을 다르게 본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가 틀렸다고 고치려한다. 상대도 대부분의 경우 습관적으로 산다. 의식하지 못하면 프로그램된 대로 말하고, 프로그램된 대로 행동(반응)하며, 프로그램된 대로 느끼며, 프로그램된 대로 생각하는 것이다.
70세 노인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지금도 프로그램된 대로 나의 생존과 번식을 위해 동작해야할까? 언젠가는 내 신경망도 자연의 법칙에 따라 와해될 것인데, 더 살려고 발버둥쳐야할까? 자식과 사회에 엄청난 부담을 주면서?.
어릴 때 두뇌가 만들어지듯이 늙으면 신경망은 퇴화하기 마련이다. 어린 자식은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므로 부모는 어려움을 모르고 키우지만, 늙어 신경망이 퇴화하여 다시 어린애가 된 부모는 생존과 번식에 별로 도움이 안된다. 오직 짐만 되는데도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할까? 불변의 나란 것도 없는데 나의 생존을 위해서.
두뇌가 망가지는 임사체험 기간에는 망가지는 부위에 따라 다양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시각중추가 좁아져 터널을 지나가기도 하고, 위치 정보가 잘못되어 체외이탈 현상을 겪기도 한다. 그러다가 많이 망가지면 의식도 사라진다. 의식이 사라지면 앎도 없다. 마치 잠자는 것과 같은 상태가 영원히 계속된다는 의미가 된다.
내가 아는 세상도 두뇌가 만들었고, 나란 것도 두뇌가 만들었다. J. Tayler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깨달음도 두뇌의 한가지 동작방법이며, 천당이나 지옥같은 사후세계도 두뇌를 가진 인간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개념이다. 어디에든 갇혀 살 필요가 없다.
두뇌에 프로그램된 대로 살 필요가 있는가?. 그러려면 순간순간 알아차려야 한다. 이렇게 순간순간 알아차림에 머물면 감정을 만드는 변연계의 동작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다. 변연계 프로그램이 멈추면 평온하다. 순간순간 알아차리면 언제나 평온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