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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고쳐야할 병이 아니다.

JungTae Lee 0

추석이 되어 큰누나를 면회하러 요양원에 다녀왔다. 지난 설에는 집에 가서 인사를 드렸는데, 6개월이 지난 지금에는 요양원에서 중간에 스크린을 설치하고 몇십 분정도 얼굴만 보다가 헤어졌다.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도 못하시고, 선망이 와서 얼굴도 잘 알아보지 못하셨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 이야기를 하면 싫어한다. 그러다가 죽음이 다가오면 아무런 대비없이 죽음보다 더 큰 댓가를 치르게 된다. 음식을 먹지 못하면 위로관으로 음식을 공급하고, 호흡이 어려우면 산소호흡기로 숨을 쉬고, 신장이 나쁘면 투석을 하고, 심장이 제 가능을 못하면 에크모를 사용한다. 위급한 순간이 오면 심폐소생술로 몸둥아리를 살리는 대신에 선망이 와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애매한 상태로 세월을 보낸다. 유언도 없이 죽으면 재산 때문에 싸우다가 자식들끼리 원수가 된다. 나는 그렇게 죽지 않을거라 다짐하지만 요양원에 가보면 이런 노인이 즐비하고, 내 자식은 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법원 근처에 가보면 이런 이야기는 흔하다.

늙으면 눈이 침침해지고, 귀는 잘 안들리고, 맛에 둔하여 음식을 짜고 맵게 만든다. 무릎은 아프고, 허리 협착으로 꾸부정해진다. 그러다가 중풍이나 치매가 오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암에 걸리면 살려고 발버둥친다. 다리에 힘이 없어 낙상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응급실로 실려가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위에서 언급한 과정을 걷게 된다.

우리 사회에는 효라는 문화가 있어, 부모가 늙어 죽게 되면 고치려하고, 큰 병에라도 걸리면 명의를 찾아 서울로 가고, 4대병원에 가야 효를 다한 것으로 생각한다. 큰 병원에 가지 않거나 중간에 치료를 중단하면 불효막심한 자식이 된다. 그런데 이렇게 마지막 정리와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고통속에서 살려고 발버둥치다가 죽는 것이 환자가 원하는 죽음일까?. 자신은 그렇게 죽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부모는 막상 그런 길을 가게 하고, 재산 때문에 자식들간에 서로 원수가 되는 길을 간다.

문화와 관습을 바꾸는 일은 쉽지 않다. 지금처럼 죽음을 병으로 보고 치료하고, 죽음의 순간에도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는 관습을 하루 아침에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죽음보다 나쁜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작금의 현실을 볼 때, 우리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옛날에는 부모가 죽으면 산소가에 움막을 짓고 3년을 죄인처럼 살았다. 내가 어릴 때는 집에 위패를 모셔놓고 매일같이 아침상을 올리면서 3년을 이렇게 지냈다. 얼마전까지 3일장을 지내면 불효막심한 일인지 아닌지 논쟁을 하곤 했다. 그리고 화장을 하면 안되니 되니 하고 논쟁하고, 이러다가 전국이 묘지로 뒤덮힐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이 3일장을 지내고 화장을 하지만 불효 막심한 자식이라 매도하지 않는다.

이제 죽음을 치료해야할 병으로 생각하고, 살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바른 길인지 한번 생각해 볼 때이다. 나는 정리할 것은 다 정리하고, 늙음을 받아 들이면서,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면서 남의 도움이 없으면 연명할 수 었을 때 생을 마무리했으면 한다.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장기는 기증하고, 몸은 대학생들 실습용으로 사용하다가 화장하여 어느 나무 아래 뿌려졌으면 한다. 장례식은 나와 인연을 정리할 사람들만 모여 이별 파티를 했으면 좋겠고, 뼈를 뿌린 곳에 내가 이 세상을 거쳐 갔다는 비석 하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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