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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JungTae Lee 0

나는 늙어도 요양원에는 가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의 경험으로 볼 때, 치매에 걸리면 요양원에 가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인의 엄마는 치매다. 결혼하지 않고 엄마와 사는 누나는 엄마 뒷바라지로 지쳐 자꾸 죽고 싶다고 한다. 엄마를 요양원으로 보내자는 부인과는 가정불화로 이혼을 했다. 회사 근무 중에도 엄마가 걱정이고, 퇴근하면 엄마 뒷바라지로 정신이 없다.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라고 하니 엄마가 낮선 사람을 거부한단다. 치매부모를 모시느라 온  가족이  초비상인데, 과연 정신이 온전한 부모가 이런 효자 자식을 바랄까?

옛날 요양원에 봉사하면서 내가 늙으면 절대 이런 곳에는 오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했다. 모든 사람이 프로그램에 따라 함께 행동해야 하니 자유롭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억지를 부리는 노인에게는 모시는 언행이 거칠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눈만 뜨면 오지 않는 자식을 기다리는 엄마와 이를 비난하는 사람이 말다툼을 하다가,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뺨을 때리고 가면 맞고 참을 수 밖에 없는 처절한 현장을 보고는 절대 오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치매 엄마를 보살피는 지인을 보고는 요양원에 가지 않는 것도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효도를 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주위로부터 “불효 막심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까 신경을 쓰며 산다. 이렇게 교육을 받아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살펴 보자. 큰 돈들여 자식을 학원에는 보내지만 부모에게 주는 용돈은 부담스럽다. 또 자식이 감기에 걸려 열이 나면 한걸음에 병원으로 달려가지만, 늙은 부모가 아프다고 하면, “늙으면 다 그런데 좀 참으시지” 하는 마음이 든다. 자식을 대하는 마음과 부모를 대하는 마음이 다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목표가 있다. 우리의 말, 감정, 생각을 만드는 두뇌의 목표는 무엇일까? 우리 두뇌는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동작한다. 살려고 발버둥치고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목숨을 던지는 사람은 드물다. 이는 짐승도 마찬가지다. 소도 새끼가 위험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지만 자기 엄마를 위해 몸을 던지는 짐승은 없다. 오랜 진화를 그쳐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하고, 그런 과정에서 두뇌는 자연스럽게 생존과 번식을 위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효는 원래 프그램되어 태어난 것이 아니다. 효를 행하려면 효를 수행하는 프로그램을 두뇌 신경망에 만들어야 한다. 교육과정에서 효를 가르치고, 부모가 효의 모범을 보이면서 자식의 두뇌에 효를 수행할 신경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교육과정에서 효는 옛날처럼 지금도 가르치지만, 부모가 모범을 보이면서 자식 두뇌에 효의 프로그램을 만드는 부모는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모습이 미래 자식의 모습”이라고 강요하면서 효를 바라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마치 엉터리 바둑 기보로 훈련한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겨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옛날에는 할아버지, 아버지, 나, 자식, 손자가 한 집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이런 환경에서는 효가 아주 중요하다. 가정의 질서가 유지되고 평화롭게 살려면 효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효가 강조되고, 교육과 모범을 통해 자식의 두뇌에 효의 신경망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분가해서 살고, 여권이 신장되어 여필종부는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이 되었는데 옛날식의 효가 유지되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특히 뇌과학의 발달로 아이들의 두뇌는 육아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아는 현대사회에서 며느리의 일방적인 희생과 고통을 강요하는 관습을 유지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노인인구의 증가에 따라 자식이 분가해 나가고 부부만 사는 노인세대가 늘어나고 있다. 부모가 늙어 일상생활이 어려운 상태에서 노인 학대의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아들이라고 한다. 늙었다고 대화에 배제하고, 더럽다고 가까이 하지 않으며,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방치하며, 더럽다고 부모가 먹던 음식을 다 버리라고 한다. 부모에게 폭력까지 행하는 자식은 드물지만,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거나 부모가 먹던 음식을 버리는 자식은 많다고 한다. 그러다 움직임이 불편해지면 요양원으로 보내고 처음에는 명절마다 들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이 마저도 가지 않는 현대판 고래장이 된다.

우리는 습관 속에 갇혀 산다. 자식이 결혼하여 분가해 나가면 밥이나 잘 챙겨먹는지 걱정이고 손자손녀라도 생기면 그저 좋아서 사방에 자랑이다. 휴대폰 대문 사진에 손자손녀 사진은 기본이고 친구라도 만나면 자랑이다. 오죽하면 돈내고 자랑하하는 규칙이 생겼겠는가? 그리고 늙어 거동이 불편해지면 당연히 자식의 효를 받으며 여생을 마무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재산은 자식에게 물려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아들에게 학대당하고 회한과 후회 속에 생을 마무리한다.

늙으면 몸도 노화하지만 두뇌도 퇴화한다. 퇴화하는 부위에 따라 다양하게 부작용이 나타난다. 이러한 노인을 경험이 없는 자식이 감당하기엔 벅차다. 노인을 공부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자식들도 있지만 대부분 경험이 없는 자식이 지혜롭게 극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노인 학대가 나오고 부모는 회한과 후회속에 생을 마감하게 되고 자식은 죄의식 속에 살아가게 된다.

부모와 자식이 별도의 가정을 이루고, 옛날과는 완전히 다른 환경에 사는 시대에도 옛날 식의 관습 속에 갇혀 살아야할까? 늙어 혼자서 살 수 없는 상태에서 자식에 기대 살아야 할까? 자식에게 기댈 것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끼리 모여 그룹홈을 만들어 살면  어떨까? 행동이 불편한 형제 자매나 친구가 모여 국가나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다가 죽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제 효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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