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라고 생각하는데, “언젠가 죽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죽는다”. 삶을 잘 마무리 하려면, 삶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잘 지내시던 아버지가 임종직전에 보인 삶에 대한 집착을 보고 죽음 공부를 했는데, 알고 보니 삶에 대한 집착이 아니고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두뇌는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동작한다. 그래서 생존에 위협이 되는 죽음이 다가오면 엄청난 공포에 휩싸인다. 그래서 살려고 발버둥치고 무리수를 두게 되어 자식들에게 엄청난 부담과 고통을 남기게 된다. 지나고 보면 어째도 죽을 일인데…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는 “나”라는 것도 두뇌가 만든 것이다. 태어나면 “나”와 세상을 구분하지도 못하던 두뇌가 제일 먼저 주객을 구분하게 된다. 이 시기가 18~24개월 정도에 일어난다. 그리고 점차 객을 구분하여 하나하나 따로 인식하게 되고, 다음으로 이렇게 나누어진 객 간에 서로 비교하여, 나의 생존에 유리한 것과 불리한 것을 나누게 되고, 그 기준이 “나”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전자를 좋아하게 되고 후자를 싫어하게 되며, 전자의 상태에 있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고, 후자 상태를 “고통”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라는 것은 두뇌가 만든 것이고 두뇌가 망가지면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임박하면 엄청난 공포가 밀려올 수 있지만, 두뇌가 조금 더 망가지면 고통도 사라지고(감정을 처리하는 변연계가 망가지면 고통도 없다) “나”라는 것마저 사라진다.
죽음이 다가오면 공포가 엄습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면 살려고 발버둥치고 무리수를 두게 된다.
늙으면 노파는 임신의 부담이 습으로 남아 대부분 성생활을 피하지만, 남자들은 죽음 직전까지 성생활를 하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80 노인이 젊은 여자와 바람을 피워 애를 낳았다는 가쉽거리가 생기는 것이다. 노인이 아기를 낳은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막상 여자를 보고 흥분한 상태에서는 자제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마찬가지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도 그 순간이 다가 오면 습관적으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무리수를 두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려면: 그 순간에 공포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 또한 지나가서 평온하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죽음도 연습해야 하는 것이다. 공포를 알아차리고,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