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을 쾌락으로 생각하는데, 언제나 기분 좋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 수 있을까? 돈이 많거나 높은 권력을 잡으면 계속 행복한 상태로 살 수 있을까?
행복을 쾌락으로 생각한다면 계속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이는 “손바닥은 필요한데 손등은 없었으면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쾌락을 느끼는 사람의 두뇌를 촬영해 보면 보상중추가 동작한다. 보상중추를 자극하면 행복해진다. 보상중추를 자극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보상중추에 전극을 꼽아 직접 자극하는 방법이다. 카나다의 제임스 울스가 쥐를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았다(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실험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쥐가 아주 행복해 했다. 다음으로 쥐에게 스위치를 눌러 전극을 자극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니 쥐는 먹지도 않고 스위치만 누르다가 죽었다고 한다. 사람도 비슷할 것으로 생각한다. 마약에 중독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보상중추는 오감으로 들어온 신호가 나의 생존에 유리하면 활성화되고 불리하면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통스러워진다. 따라서 오감을 통해 입력되는 신호를 내가 원하는 신호만 들어오게 만들면 된다. 즉 세상을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면 된다. 남편이나 마누라도 내가 원하는 소리만 하도록 만들고, 야외에 놀러가는데 비가 오면 비를 멈추게 하고, 교통체중도 모세의 기적처럼 중앙으로 길을 내면 된다. 그런데 세상을 어떻게 내가 원하는대로만 되게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쾌락을 행복으로 생각하고 추구한다면 고락을 윤회할 수 밖에 없다.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하는 지금의 인생이 아주 정상적인 것이니 그렇게 살면 된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한다. 돈이 많거나 권력이 높으면 어느 정도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 수 있다. 라면 대신에 진수성찬을 먹을 수 있고, 하기 싫은 일은 갑질하여 다른 사람이 대신 하도록 할 수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가능할 것이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연봉 7~8만불 정도까지는 행복의 수준이 돈에 좌우되지만 그 이상은 포화현상을 보인다고 한다.
돈이나 권력으로 갑질하여 즐거움을 얻는 사람은 을의 고통을 댓가로 얻은 것이다. 이는 언제나 을의 보복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므로 현명한 방법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렇게 갑질하는 사람들은 가급적 가까이 하지 않는 삶이 현명하다. 돈이든 권력이든 갑질하며 얻은 행복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쾌락을 행복으로 알고 추구하는 삶은 고락을 윤회하며 살게 되고, 이것이 정상적인 것으로 알고 살면 된다. 그러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행복은 이와는 조금 다르다. 고통이 없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는 것은 변연계의 동작에 의한다. 감정을 느끼는 변연계에는 보상중추도 있지만 고통을 느끼는 편도체도 있다. 그러면 변연계가 동작하지 않고 조용한 경우는 어떤가? 쾌락도 없지만 고통도 없다. 그냥 평온하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두뇌는 오감을 통해 입력된 신호가 나의 생존에 유리하면 보상중추가 동작하고 불리하면 편도체가 동작한다. 이 과정에서 나라는 것에 갇히지 않고 그냥 알아차림의 상태에 머물면 변연계가 동작하지 않는다. 즉 쾌락도 없지만 괴로움도 없다. 그냥 세상이 평온하다. 이 상태를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지복이라는 경지이다.
두뇌는 매순간 1100만 비트를 처리하지만 40 비트 정도만 우리가 의식할 수 있다. 99.999%는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한다.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여 쾌락을 느끼고, 습관적으로 동작하여 괴로워한다. 이런 신경망이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게 그냥 두어서는 쾌락을 반복하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냥 평온하려면 이렇게 동작하는 신경망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된다. 보상중추가 동작하여 내가 쾌락에 빠지지 말고, 편도체가 동작하여 내가 괴로워하지 말아야 한다. 쾌락을 느끼면 “보상중추가 동작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고, 화가 나면 “편도체가 동작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된다. 매 순간 알아차림에 머물면 언제나 평온하다. 언제나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