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즈 애덤스는 “나이듦에 대하여” 라는 책에서 노인들이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도 자신들의 인생이 비참해지도록 예약해 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초고령사회가 됨에 따라 노인들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현실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얼마 전에 전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노인이 젊은이 앞으로 가서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다가 젊은이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쩌다가 우리 노인은 사회로 부터 추하고 피하고 싶은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까?
개인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걷지도 못하고 그냥 두면 굶어 죽을 자식을 애지중지 이렇게 키워준 부모들이 노인세대인데… 사회적으로 볼 때도 보리고개, 옥수수 급식, 전쟁, 독재 등으로부터 세계적으로도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이 부모세대이고 노인세대인데, 이렇게 피하고 싶은 편견의 대상이 된 것은 안타까운 문제다. 이것이 사회 관습으로 정착된다면 지금의 젊은이도 추하고 경멸의 대상이 될 인생을 미리 예약해 두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노인이 되면 대부분의 경우 욕심에서 좀 벗어날 수 있고, 오래 살아 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지혜로워 질 수가 있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이런 지혜를 경청하면 나중에 후회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전후세대는 1년에 100만명 이상 태어났는데 올해 태어날 애기는 30만명 이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은 너무 많고 이를 부양할 손자손녀들은 너무 부족하여 젊은이들의 미래가 불안해질 것이다.
나이가 들면 두뇌가 노쇄해지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으로 된다. 이런 노인이 많지 않을 때에는 사회적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이제 초고령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노인의 인구가 40%에 육박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가 정책이 노인들에 의해 좌우되고, 젊은이는 뼈빠지게 일해서 세금을 내는데 자신들의 삶이 어렵기만 하니 노인들에 불만이 쌓여가기만 하는 것 같다.
내가 대학교수로 부임하고 얼마되지 않아 정년을 6개월 정도 둔 노교수님들이 신임교수 채용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학과를 마비시키다 시피하는 사건을 보았다. 그 때 내 생각이, 정년퇴임 후에는 아무 관계가 없을 일인데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래 사회는 우리 자손들이 살아갈 세상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선택은 젊은이들에게 맡겨두고, 노인들은 존경받는 위치에 머물고, 선거에는 나서지 않고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 늙은이는 투표권을 반환하고 존경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그래서 올해부터는 투표에 참가하지 않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