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장 샤워실에서 중풍으로 몸이 불편한 사람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며칠 전 돌아가신 동료가 평소에 자식들의 서운한 점을 자주 토로하셨는데, 장례식도 쓸쓸하게 치렀다는 이야기였다. 노인들이 모이면 자식들이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부모에 대한 효도 두뇌의 동작이고, 두뇌의 동작 측면에서 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의 모든 시스템은 목표가 있다. 자동차는 이동이 목표이고, 선풍기는 시원하게 하는 것이, 심장은 피를 순환하게 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면 두뇌의 목표는 무엇일까? 생존과 번식이다. 개체의 생존과 자식의 번식이다.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두뇌가 생존과 번식을 목표로 동작하였기 때문이다.
두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절대 중요하다. 자식을 돌보는 것은 처음부터 두뇌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새롭게 신경망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가르치지 않아도 자식은 돌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부모는 다르다. 늙은 부모를 돌보는 것은 생존과 번식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효를 실행하려면 신경망을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즉 효를 실행하려면 어릴 때부터 교육을 통해 관련 신경망을 만들어야 하고, 그런 빅데이터 환경에서 육아하여야 한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자식은 목숨을 걸고 보호하지만 늙은 부모를 돌보는 동물은 없다. 자식을 돌보는 신경망은 타고 나지만 효를 실행하도록 교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모를 챙기지 않은 자식도 짐승 수준은 되는 것이다.
효를 실행하려면 어릴 때부터 관련 신경망을 형성하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옛날처럼 한 집에서 대가족을 이루고 살아야 할 경우에는 서열이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핵가족으로 살고 여자들의 권리가 신장된 환경에서도 옛날과 같은 효가 중요할까? 물론 있으면 좋겠지만 그러려면 자식 교육에 효의 빅데이터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부모가 효를 실행하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그렇게 교육시키지 않고 기대하는 것은 기대하는 본인만 괴로울 뿐이다.
두뇌에 그런 신경망이 미약한데 효를 바라고 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일까? 어린 자식은 생존을 위해 반드시 돌봐 주어야 하지만, 혼자서 살 수 있는 부모의 경우 자식의 효를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지 않을까? 이웃도 돌봐 주어야 하는데 자립할 수 없는 부모는 돌봐야 하겠지만, 자립할 수 있는 부모의 경우 옛날과 같은 효를 바라는 것은 신경망이 없는데 기대하는 일이 된다. 물론 돈으로 효를 강제할 수는 있지만 이것도 부모가 의식이 있고 움직일 수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그 선을 넘어가면 돈으로도 효를 강제할 수 없는 일이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립이 가능하면 효를 기대하지 않고 자립하여 살면 된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고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신경망은 없는데 그런 행동을 기대해야 하니 어려운 이야기다. 그래서 동물의 세계에서 한번 그 답을 찾아보게 된다. 코끼리는 어떻게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