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만나면 요사이 젊은이는 교육이 잘못되어 효도를 할 줄 모른다고 불만이다. 과연 맞는 말일까?
옛날 대부분 국민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대가족으로 살 때에는, 할아버지도 농사를 짓고, 아버지도, 나도, 그리고 손자도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지혜가 큰 도움이 되었다. 언제 논에 물을 잡고, 언제 씨를 뿌리고, 씨는 어떻게 뿌리는 것이 수확에 도움이 되는지 할아버지의 지혜가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스마트폰으로 모든 것을 처리하고, 인공지능이 노예처럼 인간을 돕는 4차산업시대에 스마트폰도 못쓰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젊은이들에게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핵가족화되어 노인들만 따로 살고, 여자도 남자보다 더 많은 교육을 받아 남녀 구분이 없이 키운 시대에 옛날과 같은 효가 과연 가능할까?
노인을 공경해야 하고, 노인들의 말에 귀기울여야 하고, 치매부모라도 지극 정성으로 모셔야 하고,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을 치러야 하는 효를 실행하려면 누구의 희생이 뒤따라야 한다. 세상은 급변하여 스마트폰으로 전화도 하고, 사진도 찍고, 친구와 소통도 하고, 뉴스도 보고(TV 처럼) 신문을 읽고, 책도 읽고 듣고, 세상에서 제일 싼 집을 골라 물건도 구입하고, 부산의 집에 있는 전등을 서울에서도 켰다껐다 하는 시대에 스마트폰도 못쓰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무조건 따라야할까?
고령화사회인 일본에는 간병살인이 많다고 한다. 치매노인을 모시다가 자식이 부모를 죽이기도 한다고 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잠을 자지 않는 치매 부모를 간병하다가 순간적으로 부모를 죽인 자식이 앞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어제는 중풍으로 입원해 있는 친척을 문병갔는데, 마침 똥오줌을 침대에 실례하여, 회사에 연가를 내고 이를 뒷바라지 하는 큰딸의 한숨소리를 들으니 일본의 실상이 먼 나라 이야기같이 들리지 않았다.
이제 효도 시대에 따라 바뀌어야 한다. 누군가의 한숨 속에, 누군가의 삶을 파괴시키는 희생 위에 이루어지는 효도는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동물들은 어떻게 사는지, 나는 부모님께 어떻게 효도를 했는지 살펴보았다. 짐승들은 목숨을 걸고 새끼를 돌보는데, 자기 엄마 돌보는 짐승은 없다. 나도 내 자식이 아프다고 하면 한밤중에도 업고 병원으로 갔는데, 노령의 엄마가 아프다고 하시면 “늙으면 여기저기가 아픈데 좀 참으시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 자식까지 돌보지 않는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지만 자식은 돌보지만 부모는 돌보지 않는 인간은 짐승만큼은 하는 인간이다. 이웃도 도와주며 사는데 늙어 힘없고 능력없는 부모를 돕는 사람은 물론 짐승보다 나은 인간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본다. 우선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없어야겠다는 생각이든다. 내리 사랑이라고 했지 않는가? 똥오줌 가리며 키워준 사랑은 내가 받자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에게 하면 된다. 다행히 우리 부부는 건강하고 먹고 살 입장은 되기 때문에 부부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렇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한 사람만 남았을 때, 움직일 수 없고 도움을 받아야할 때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그래서 의미없는 삶을 이어가지 않도록 사전의료의향서는 준비해 두었지만, 이것마저 내 의사대로 할 수 없는 경우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그래서 스위스의 조력사를 조사해보게 되고 해답을 찾고자 한다. 자식이나 국가에 부담을 주지 않는 방법을…
효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어야 하고, 당분간은 혼란스럽고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는 내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면서 그 환경을 빅데이타로 하여 손자손녀들의 두뇌를 트레이닝시켰으면 한다. 내리사랑이면 족하고 기존의 효에 매달리지 않고 죄책감이 없이 살았으면 한다. 단지 어려운 이웃을 돕고 살듯이, 아들 딸이 도움을 청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돕는다. 마찬가지로 내 자식들도 효에 구속되지 않고 부모가 도움을 요청하면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도와주면 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성립되는 효는 급변하는 시대에 맞추어 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