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대부분 자식이 부모와 따로 살기 때문에, 부모가 죽으면 유품 정리가 문제가 된다. 자식은 생활하기 위해서 냉장고 등 대부분 생활용품을 별도로 마련해 사용하고 있어서 부모가 죽어서도 가져갈 물건이 별로 없다. 그래서 유품정리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부모 집에 와서 귀금속이나 현금과 통장을 챙기고 나머지는 유품정리사에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한다고 한다. 자식도 살기 바쁜 세상이라 부모 집 정리에 며칠을 소비할 수도 없고, 그리고 챙겨봐야 가져갈 물건이 별로 없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죽기 전에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살림살이를 미리 정리하는 것도 자식들을 도와주는 일이 될 것이다. 영국에서 평생 노인의학을 전공하고 노인들을 치료한 데이비드 제럿이 지은 “이만하면 괜찮은 죽음”이라는 책에 보면, 부모님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40년 된 마요네즈가 나왔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수십 년 된 연구 노트, 밑줄이 새까맣게 그으진 낡은 책, 입지 않은 옷가지 및 사용하지 않은 그릇 등 많은 물건이 나올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올해는 물건을 정리하는 해로 정하고 책, 옷가지, 그릇 등 세간을 하나씩 정리해 나갈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 먼저 책 정리에 들어갔다. 근무하던 대학에 연락하니 책을 받겠다고 하여 하나씩 정리하여 기증하기로 했다. 정말 정이 가는 책, 손때가 묻어 버리기 아까운 책 등, 많은 사연이 있지만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주로 뇌과학에 대한 책이고, 국내에서 뇌과학 분야에 발행된 책은 거의 사 본 책들인데, 이제는 이별해야겠다. 더구나 요사이는 거의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고 있으니 더욱 필요 없어진 책이다. 정리할 때마다 다시 볼 것 같아 망설여지지만 정리하지 않고 두면 자식들에게 부담만 될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과감히 정리하기로 했다.
정리하면서 느끼는 점인데, 옛날에는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 지금 보니 참 하찮은 일이란 점이다. 그 당시에는 아주 비싼 카메라를 사 애지중지 찍은 사진과 비디오들이 이제 애물단지로 느껴진다. 테이프에 저장된 영상이나 음악은 이제 보기도 어렵고 듣기 어려워 버려야 할 처지다. 특히 수집하면서 자랑스러워했던 레코드판은 이제 쓰레기로 버리기도 어려운 처지다. 세상 어떤 일이나 생각에도 갇히지 말아야 하는 건데.
이제 하나씩 삶을 정리해야겠다. 올해부터는 선거도 기권할 생각이다. 노인들이 많은 세상에서 정치인들이 표를 의식하여 노인 위주의 정책을 펼치면 세상은 어려운 길로 갈 것이다. 노인들이 권한만 휘두르고 아무것도 책임질 수 없으니 젊은이들은 살기 힘들고 세대갈등이 심각해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가지 못한 노인들 때문에 극우가 판을 치고 점차 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래서 나부터 선거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제부터 짊도 정리하고, 세상일에도 한 발짝 물러서야겠다. 병이 없기를 바라고 치료하기보다는 병을 관리하면서 병과 함께 살다가 때가 되면 떠나야겠다. 그래서 하나씩 준비해 나가야겠다.
나란 것은 두뇌가 만든 것이다. 두뇌가 만든 것이니 두뇌가 망가지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나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이니 “죽는 나”란 것도 없다. 단지 두뇌가 망가져 언젠가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갈 뿐이다. 그러니 어디에도 갇히지 말라. 심지어 “나”란 것에도 갇히지 마라. 그냥 “알아차림”에 머물고 있으면서 자연의 순리대로 흘러가면 된다. “알아차림”에 머물면 죽음도 평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