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는 고령자 및 지병을 앓는 노인들에게 치명적이라고 한다. 확진자가 죽으면 감염 때문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가족과 이별도 못 한 채 화장터로 향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도 못 한 채 이렇게 떠나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떠난다고 해서 영혼이 천국에 못 가고, 소위 원혼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 주위를 맴돌게 될까? 임종을 못 한 자식들은 불효막심한 것일까? 종교나 믿음에 따라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환경에 반응하고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두뇌의 동작에 의한 것이다. 중풍이나 치매에 걸려 반신불수가 되거나 기억을 못 하는 것은 옛날 같으면 “전생에 죄가 크다”라거나 “조상의 원혼 때문”에 그렇다고 믿는 시대도 있었지만,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는 두뇌에 고장이 생겨 일어나는 현상임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앎의 근원이 되는 의식도 두뇌의 동작에 의한 것임을 알고 있다. 잠을 자거나 마취로 의식이 없을 경우와 깨어 있을 때 두뇌의 동작을 비교하면 의식도 두뇌 동작에 의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죽으면 두뇌는 망가진다. 두뇌가 망가지면 움직일 수도 없고 말도 못 하지만 의식도 없어진다. 의식이 없어지면 우리의 앎도 없다. 18개월 이전의 어린아이는 “나”와 세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마찬가지도 두뇌에 손상을 입은 코타르 증후군 환자는 자신이 없다고 한다. 즉 “나”라는 것도 두뇌가 만든 것이고, 우리는 평생 “나”란 것에 갇혀 살다가, 죽으면 두뇌가 망가지고, 두뇌가 망가지면 “나”라는 것도 없어진다.
티베트에는 사람이 죽으면 시신을 높은 곳에 올려 두어 새들에게 공양한다고 한다. 코타키나발루의 원주민들은 부모가 죽으면 산속에 두어 짐승들에게 공양한다고 한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불효막심한 미개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가치관에서도 불효막심한 짓일까? 코로나 19로 임종도 못 한 자식들은 불효막심한 인간들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 우리끼리 그렇게 약속한 사항이고 세월이 흘러가면 바뀔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평소에 그리 대단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떤 집에 문상하러 가면 입구부터 화환이 즐비해 있다. “우리 집은 이렇게 대단한 집안”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고인을 평생 한 번 만나 본 적도 없는데, 상주와 인연 때문에 문상하러 간다. 그래서 겉으로는 슬픈 표정을 짓지만 영 부자연스럽다. 인사를 하고 나서는, 문상을 온 것인지 놀러 온 것인지 모르게 크게 떠들고 웃음꽃이 피기도 한다. 장례식에 고인은 없고, 주인공이 아니다. 옛날에는 삼년상, 일년상을 했는데 요사이는 많이 간소화되어 오일장이나 삼일장을 한다. 그렇게 날짜가 지나면 가족끼리만 화장터에 가서 고인을 전송하고 묘지는 그럴듯하게 만든다. 우리 집안은 대단한 집안이라는 것을 과시하듯이…
이제까지 역사에서 예외가 없는 것이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안 죽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도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부자연스러운 것이 참 싫다. 꽃으로 즐비한 장례식장도 부자연스럽고, 억지로 슬픈 표정을 짓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죽어서 두뇌가 망가지면 의식도 없어지고 “나”라는 것도 없어진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내 몸에서 사용 가능한 장기가 있다면 필요한 사람에게 주고, 몸은 의대생들의 실습에 사용했으면 한다. 시신이 없는 장례식도 참 부자연스러울 것 같다. 그래서 장례식 대신에 이별의 파티를 했으면 한다. 생일 파티 하듯이, 어느 시간, 어느 장소를 정해 나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만 모여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이별하는 모임이면 족하다. 꽃도 필요 없고, 장례식도 필요 없고, 묘지도 필요 없다. 그냥 추억을 정리하며 이별하는 것으로 족하고, 부모님 산소 곁에 비석 하나면 족하다. 이 세상을 거쳐 갔다는 흔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