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을 맞아 요양원으로 장모님을 뵈러 갔다. 코로나 정국이라 비대면 면담만 가능하여, 창을 사이에 두고 찾아뵐 수밖에 없었다. 장모님은 치매 환자라 자식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시고, 오직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으셨다. 이런 짧은 면담마저도 다음 대기자가 있어 지속할 수가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며 만감이 교차하였다. 두뇌가 퇴화하면 인간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보니, 세상만사에 왜 그렇게 집착했는지 허망하게 느껴졌다.
늙으면 몸의 여기저기에 고장이 생기지만, 이것은 참을 만하다. 그러나 두뇌가 퇴화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노인이 되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기억하지 못하여 잘 잊어먹고, 상대방의 말을 듣지 않고 중간에 끊고 자기주장을 하며, 행동이 둔하며, 고집이 세고, 말이 많고, 남의 험담을 하거나 자기 자랑이 심하다. 또 변화를 싫어해서 보수적이고, 특히 이기적이다.
아파트 물탱크 청소를 한다고 종일 물이 나오지 않으니 미리 물을 받으라고 했다. 그래서 욕조에 물을 틀어 두었는데 몇 시간 후에나 이 사실을 알고 달려가니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때로는 가스 불을 켜놓고 잊어버려 냄비를 다 태우기도 한다.
노인이 되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오래 기억하지 못하니 상대가 이야기하는 중에도 듣지도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 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 말이 많다. 특히 손자 손녀 이야기가 나오면 밑도 끝도 없다. 그래서 손자 손녀 이야기를 하려면 돈을 내놓고 하라는 규칙이 생기기도 한다.
세상 모든 것은 오래되면 퇴화한다. 두뇌도 마찬가지다. 특히 안와전전두엽이 퇴화하면 인내심에 문제가 생긴다. 참지 못하니 버럭쟁이가 된다. 또 대상회가 퇴화하니 전환이 잘 안 되어 고집불통이 된다. 두뇌가 퇴화하여 감에 따라 맡고 있던 기능이 퇴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이 망가지면 “나”라는 뿌리만 남아 이기적으로 변하며, 더욱 망가지면 생존에 매달려 먹는 것에만 집착하게 된다.
먹는 것에만 집착하는 치매 환자가 자기의 상태를 알까? 자기의 상태를 아는 알아차림 기능까지 퇴화하였으니 알 수가 없다. 알 수 없으니 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친구와 여행을 같이 갔다. 친구는 새벽에 일어나 TV를 크게 켜서 듣고 있었어, 시끄러워 잠을 깼다. 친구는 나이가 드니 잘 안 들린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가 들을 수 있는 볼륨으로 듣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시끄러워 잠을 깬 것이다. 그런데 친구는 자기 상태를 알고도 크게 켰을까? 아닐 것이다. 상황을 알지 못한 채, 볼륨을 자기에게 맞춘 것이다. 자기 상태를 알지 못하면 바꿀 수가 없다.
인간은 바꾸지 않으면서 자기합리화한다. 손위 매형은 운전대를 놓았다. 사고를 두어 번 내고는 자식들의 만류로 운전을 그만두었다. 운전을 못 하니 나들이 갈 때 많이 불편하다. 그래서 운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고는 급발진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항변하신다. 그러면 자식들은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귀엣말로, “그 자동차 가져간 사람 아직도 고장 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라고 귀띔해 준다. 이와같이 나이가 들면 운동감각이 둔해지지만, 본인은 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면 자기합리화하는 것 같이 보인다.
식당에 갔다. 노인 둘이 식사를 하면서 입에 담지 못할 수준으로, 큰 소리로 대통령 욕을 하면서, 왕년의 자기 자랑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잘 나가는 정치인 누구누구는 왕년에 모두 자기 밑에서 벌벌 기었다는 식으로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그 식당을 나왔다. 노인들이 있는 곳이면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그 이후로는 노인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으면 발길을 돌린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노인을 피하려 한다. 말은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하고, 고집이 세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모시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인들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두뇌가 퇴화하여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늙어도 꾸준히 두뇌 훈련이 필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다. 내가 잘 잊어버릴 수도 있고, 고집을 피울 수도 있고, 말을 많이 할 수도 있고, 움직임이 둔할 수도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알아차릴 때 변화의 가능성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