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만 해도 50여 호의 시골 마을은 거의 모두가 우리 집안 사람들이었다.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밀하게 지냈고, 모두 가난하여 소풍 갈 때 달걀이라도 삶아 가는 날은 대박이었다. 이런 사회에서는 보통 3대가 한집에 살았기 때문에, 조상을 잘 모셔야 하고, 효가 중요한 덕목이었다. 혹시 제사를 소홀히 하거나 불효를 저지르면 집안의 사람들의 눈밖에 벗어나서 살아남기 어려웠다.
지금 고향에 가면 집안의 사람들은 거의 없다. 우리 대에서는 어릴 때 함께 자랐기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살아도 서로 소식을 전하고, 명절이나 경조사에는 모여 관계를 다지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다음 세대에 가면 사촌만 해도 거의 교류가 없고 집안의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잘 모르고 산다. 학교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어울려 살고, 집안의 사람들과는 거의 교류가 없이 산다.
인간은 개체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신경망이 두뇌에 뿌리 깊게 프로그램되어 있다. 하기야 그런 조상의 후예이니 지금까지 살아남았고,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니 교육받지 않고 경험하지 않아도 단단히 프로그램되어 있을 것이다.
개체가 살아남거나 종족을 보존하려면 의식주가 중요하다. 먹을 것이 있어야 살아남지 않겠는가?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배가 고팠다. 그런 사회에서는 먹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 이해되지만 요사이 같이 먹을 것이 풍부하고, 혹시 극빈자가 되어도 국가에서 기초생활을 도와주고 있으니 먹을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세상이다. 그러나 우리는 혹시나 먹을 것이 없어질까 두려워하면서 더 많이 쌓아두려고 한다. 무의식적으로 두뇌에 프로그램된 대로 산다는 의미다.
의복도 마찬가지다. 삼배로 사시사철을 보내야 하는 시절에는 추위가 문제가 되고, 간혹 얼어 죽는 사람도 있었지만, 요즘처럼 좋은 옷에 얼어 죽을 일은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언제나 의복에 신경을 쓰고 특히 내 의복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집도 마찬가지다. 밀림에 사는 것도 아닌데 더 좋은 아파트에 목숨을 건다. 즉 프로그램된 대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온종일, 같이 생활한 동료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머리 스타일이 어떠했는지 모를 때가 많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의복에 큰 관심을 두지 않듯이 다른 사람도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목에 신경을 엄청나게 쓴다. 옛날 씨족사회같이 다른 사람의 눈밖에 벗어나면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에는 모를까, 지금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 너무 많은 신경을 쓴다.
세상은 변하여 어지간한 일은 사람 대신에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할 수 있다. 사장 입장에서 돈 버는 일만 생각한다면 사람보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 더구나 코로나 19까지 덮쳐 이런 시대가 앞당겨지고 있다. 즉 일자리가 없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지만 가난한 사람은 일자리도 없어 점차 코너로 몰리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가치관으로는 이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즉 내가 경쟁에서 이겨 돈을 많이 벌고 출세를 해서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지속 가능하지 않는 사회로 가고 있다.
옛날에 비하면 엄청나게 잘 먹고 있는데, 우리는 왜 계속 배가 고파야 하나? 옛날에 비하면 엄청 좋은 옷을 입는데 우리는 왜 다른 사람보다 좋은 옷을 입어야 하고 좋은 아파트에 목을 매며 살아야 하나? 씨족사회에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살펴야 하고, 집안이라는 테두리에 갇혀 살아야 하나?
이것은 두뇌가 생존모드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진화의 과정에서 밀림에 살아남기 위해 언제나 먹는 것에 신경 쓰는 신경망이 지금의 환경에서도 그대로 작동하고, 평판에 갇혀 고립되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에서 만들어진 신경망이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여 남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환경은 완전히 바뀌었다. 코로나로 세상은 더욱 바뀌어 가고 있다. 줌으로 집에서도 근무하고, 원격 교육으로 공부도 하고, 심지어 집에서 여행도 하고, 안방에 앉아 연주회나 전시회도 참가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변해 가는 세상에 내 두뇌는 원시시대에 만들어진 신경망이 그대로 동작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거기에 갇혀 변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면 잘못 반응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진다. 내 두뇌에서 어떤 신경망이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는 것은 아닌지, 그 속에 갇혀 사는 것은 아닌지, 한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문명사회에서 원시 신경망으로, 프로그램된 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