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때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필리핀, 캄보디아와 같은 나라에서 한국에 돈 벌러 오듯이, 한국 사람들이 일본으로 돈 벌러 가서 고생해서 번 돈을 한국의 가족에게 송금하기도 했다. 다들 먹고 살기 어렵다 보니 부모들은 자식에게 고생시키지 않고 잘 살게 하는 것이 꿈이었다. 가난한 집은 그럴 여유도 없었지만, 부자들은 자식에게 고생시키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그래서 한 세대가 지난 지금에서 보면 그때 부자들은 거의 자식이 망해 어렵게 살고 있다. 고생해보지 않은 자식들은 자신이 해결할 능력은 없고, 부모가 준 재산을 까먹다 보니 가난해진 것이다. 망해도 3대가 간다고 할 정도의 재벌이 아니면 하나같이 망하고 그때 어렵게 고생한 집 자식들이 부자가 되어 있음을 볼 때 자식은 고생을 시켜야 한다는 말이 실감 난다.
집사람 친구분 중에 아들이 치과병원을 하는 분이 둘 있다. 둘 다 서울에서 치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지난번 모임에서 B는 아들이 부산에 와서 또 몇천만 원을 주었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A가 그러다가는 부모도 자식도 망하고 둘이 원수 된다고 진심으로 충고를 했다가 싸울 뻔했다고 한다. A의 아들은 치과대학을 나온 후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경험을 쌓고 나중에 자력으로 병원을 개설하였고 성공하여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러다 보니 부모에게 가전제품이라도 선물을 해 주고 있는데, B의 아들은 치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 갔다 와서 서울에서 개업하였다. 병원경영의 경험이 없다 보니 지금도 부모님께 손을 벌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잘 되면 좋은데, 3자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걱정스럽다.
내가 어릴 때 공부 잘하고 똑똑한 C라는 지인이 있었다. 모범생이라 말썽부리는 일도 없었고, 부모들은 우리에게 “C의 반만 따라가라”고 할 정도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당시 가장 좋은 학교인 경남 중고등학교와 육사를 졸업하고 평생을 군인으로 살았다. 장관은 육사를 나와야 한다는 시대라 육사가 최고의 대학이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은 태극기 부대 데모에 나가 마이크를 잡는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 전에 몇십 년 만에 그분을 만난 자리에서 일제 위안부에 대해 막말을 하는 소리를 듣고 어릴 때 선망의 대상이 맞는지 실망스러웠다. 차라리 사춘기 시절에 한 달 용돈을 친구에게 빌려주고 받지 못한 경험도 있고, 친구들과 싸워 다쳐 오기도 하고, 등록금을 가지고 캠핑을 다녀와서 엄마를 한숨짓게 한 친구는 70세 나이에 사장하면서 잘살고 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에게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싶어 한다. 좋은 유치원에 보내고, 사춘기에는 모범생으로 공부를 잘하여 일류학교에 들어가기를 바란다. 즉 좋은 환경에서 좋은 정보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뇌과학에서 보면 좋은 정보보다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세상이 바뀌지 않고 언제나 똑같은 환경에 산다면 모를까, 그런데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매일을 살다 보면 어제와 오늘은 비슷한 것같이 느껴지지만 20~30년이 지나면 우리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이 변한다. 특히 4차산업혁명에다가 코비드-19까지 덮친 세상에서 그 변화의 폭은 가름하기 어렵다. 인공지능, 로봇, 자율자동차 등이 등장하여 일자리가 없어지고, 중국이 부상하는 세계정세를 볼 때 변화무상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내가 보는 세상은 내 두뇌로 해석한 세상이고 내 두뇌의 신경망으로 세상을 살아간다. 어릴 때 친구에게 돈을 떼인 경험이 있는 친구는 30이 넘어 친구 보증을 섰다가 망하는 경우는 드물다. 자기보다 힘이 센 친구와 싸워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어른이 되어 실수하지 않는데, 모범생으로 살다가 평생을 군인으로 보낸 사람은 C처럼 극우가 되어 자기 세계에 갇혀 산다. 모범생의 좋은 정보만으로 훈련된 신경망은 아주 단순하여 자기 세계에 갇혀 사는 것이다.
인간의 두뇌는 완성되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라면서 만들어진다. 육아 환경이 빅데이터가 되어 트레이닝 되는 것이다. 어릴 때 사기당한 경험이 없으면 결혼하여 가족을 가진 상태에서 친구 보증 섰다가 가족이 풍비박산되기도 한다. 한국 문화만 접한 사람은 옛날식의 제사에 갇혀 직장에 나가는 며느리와 갈등을 일으키고, 그 정서를 고스란히 손자들에게 전수하고 있으면서도 손자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맨날 엄마 아빠가 싸우는 것을 보고 자란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부자가 되거나 성공하면 그 후에는 쭉 행복해질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행복한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지고, 순간순간 변하는 감정이며, 이 감정을 처리하는 변연계는 어릴 때 만들어지는데…
육아는 자식의 두뇌를 만드는 과정이다. 자식은 그렇게 만들어진 신경망으로 평생을 살아간다. 급변하는 세상에 잘 적응하면서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좋은 정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릴 때 실패를 해 보고 극복한 경험이 있는 친구가 실패해도 자신감을 가지고 세상을 헤쳐나간다. 초보일 때는 어렵지만 경험 많은 운전자는 자신 있게 운전해 나가는 것과 같다. 육아는 좋은 환경이 아니라 좋은 두뇌를 만드는 과정이다. 좋은 두뇌는 다양한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