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 행복을 어떤 조건이 만족되면 주어지는 것으로 보고, 성취해야 할 목표로 생각한다. 만나는 학생마다 물어본 적이 있다. “왜 공부를 하는가?” 하고 물어보니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서”, “왜 좋은 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하고 물어보니,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 “왜 좋은 직장에 취직하려고 하는가?” 하고 물어보니,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왜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가?” 하고 물어보니,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결국은 행복이 최종 목표이고, 돈을 많이 벌면 그때부터 행복하리라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돈을 많이 번 사람은 그때부터 행복하게 살까? 얼마를 벌면 이것이 가능할까?
주위에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지 한번 살펴보라. 소위 출세를 한 사람 중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조건을 만족시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행복은 그런 조건이 성취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목표가 아니다.
행복한 사람의 두뇌를 fMRI로 촬영해 보면 보상중추가 동작한다. 지금 여기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나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면 보상중추가 동작하고, 불리하면 편도체가 동작한다. 즉 생존을 위해 필요한 자원을 획득할 수 있으면 우리는 즐거움(행복)을 느낀다. 행복이라는 미끼를 주어 인간이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행동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아니 우리는 두뇌가 그렇게 동작한 조상의 후손들이다.
행복은 생존을 위해 두뇌가 만든 도구다. 행복은 지금 여기 나에게 주어진 환경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두뇌의 상태이며, 이런 두뇌의 동작은 프로그램된 대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 즉 나의 두뇌에 어떤 신경망이 있는가가 중요하고, 지금 여기 나에게 주어진 환경이 중요하다. 행복은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지 조건이 만족되면 계속 유지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신경망이 상수(변하지 않는)라면 행복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변수로 보고 환경을 나의 생존에 유리한 형태로 바꾸어야 한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같이 행복은 생존을 위해 두뇌가 만든 도구다. 생존을 위해서는 먹고사는 것(먹고사니즘이라고 하자)이 중요하고,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먹는 것이 즐겁고, 내 편인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이 행복하다.
먹고 살 수 없으면 행복하기 어렵다. 그래서 연봉 7~8만 불 정도까지는 행복지수가 수입에 비례하지만, 그 이상에서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행복은 돈이나 물질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고, 돈이나 물질에 매달리는 사람일수록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인간관계도 먹고사니즘에 못지않게 행복에 영향을 끼치는 인자인데—
인간관계는 양날의 칼이다. 나의 생존과 종족 보존에 도움이 되는 관계도 있고, 위협이 되는 관계도 있다. 상대를 내가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모두 좋은 관계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위협이 되는 관계는 적이 되지 않게 하는 수준에서 관리하면서 좋은 관계에 집중하며 살면 된다. 그래서 행복을 연구하는 어느 심리학 교수는 “행복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하면, 좋은 사람과 어울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기회를 많이 가지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신경망은 그대로 두고 환경만 바꾸어 행복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나에게 주어진 환경은 내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돈을 많이 벌거나 권력을 가지면 환경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은 아주 미미하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마누라가 내가 원하는 소리만 하게 만들 수 없고, 밀리는 교통체증을 내가 단번에 해결하는 방법이 없다.
두뇌는 가소성이 있다. 신경망은 바뀔 수 있다는 의미다.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두뇌 신경망을 바꿀 수 있다. 실제로 신경망은 수시로 바뀌기도 한다. 새집을 사서 이사하면 기분이 좋고, 복권에라도 당첨되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문제는 몇 개월 정도 지나면 새집이 즐거움에 도움이 안 되고, 복권에 걸린 사람은 대부분 일이 시시해 보인다. 우리 두뇌는 환경의 변화에 천재적으로 적응하는데, 새집이 처음에는 즐거움을 주지만 조금 지나면 기준선이 새집으로 바뀌어(신경망이 변해) 우리 집보다 넓은 친구 집이 부러워진다. 복권에 당첨되면 기대치가 그만큼 높아져 어지간한 것은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이 문제다. 전에는 중고 티코를 타고 다녀도 좋았는데, 몇백억 복권에 당첨된 후에는 티코만 봐도 짜증이 난다. 이런 경우는 적응을 통해 신경망의 기준선이 상향됨으로써 행복지수를 낮추는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욕망을 줄여 기준선을 낮춤으로써 행복지수를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도 이 문제에 매달려야 하나? 원시의 밀림에서는 먹고사니즘이 생존에 절대적으로 중요했는데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도 먹고사니즘을 생존의 문제로 보고 동작하는 신경망은 분명히 오동작이다. 이런 신경망을 그대로 두고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 없다.
행복은 생존을 위한 도구인데, 생존을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하였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생존을 절대 가치로 두어야 하나? 죽음이 멀지 않은 노인의 나이에도 생존에 매달리는 두뇌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야 하나?
이 세상에 병들지 않고 죽지 않은 사람은 없다. 결국은 생존에 매달리면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다. 병들면 고통스럽고 죽음은 두렵다. 무의식적으로 동작하는 두뇌 신경망을 그대로 두면 환경에 따라 고락을 윤회하고 병들고 죽기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다.
행복을 즐거움이라는 생각에 갇히면 우리는 고락을 윤회할 수밖에 없다.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를 반복하며 사는 것이다. 그러나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조용하면 어떤가? 평온한 것을 행복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어디에도 갇히지 않고 알아차림에 머무는 것이다. 내가 즐거운 것이 아니라 “내가 즐거워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리고, 내가 괴로워하지 않고 “괴로워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림에 머무는 것이다. 그런 신경망의 동작을 알아차리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순간순간 알아차리면 신경망의 동작이 다음 단계로 계속 진행되지 않아 변연계가 조용하고, 언제나 평온한 상태에 머물 수 있다. 평온(괴로움이 없는)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가 있다. 이러한 행복은 어떤 조건과 관계가 없고 단지 자신의 신경망을 바꾸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깨우쳐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