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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싸움은 좋은 두뇌를 만드는 기회

JungTae Lee 0

두뇌는 순간 1,100만 비트의 정보를 처리하는데 이 중에서 40비트 정도만 의식된다. 즉 99.9994% 정도는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고 우리는 습관대로 산다. 따라서 두뇌 신경망이 만들어지는 성장 과정이 정말 중요하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힘든 과정이다. 잠도 못 자고 기저귀 갈 때는 “똥오줌만 가리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크니 싸우고 말을 듣지 않아 “옛날 기저귀 갈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해야 할 일도 많고 짜증이 나서 부부간 싸울 일도 늘어난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싸우면 “하지 마”, “누가 그랬어?”, “왜 그랬어?”, “혼나 볼래?”, “형이 참아”, “동생이 형에게 대들지 마”, “순경 아저씨(혹은 귀신) 잡으러 온다” 등의 말이 절로 나오고, 말을 듣지 않고 떼를 쓰면 한 방 때려주려고 손이 절로 올라간다.

부모들은 자식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한다. 그래서 열심히 돈을 벌어 좋은 교육을 하고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좋은 교육을 하고 최선을 다해 판검사, 의사, 교수로 키웠지만, 판검사, 의사, 교수가 되어 꿈을 이룬 사람들은 행복한 것 같지가 않다. 고생시키지  않고 귀공자처럼 키웠는데 망나니 같이 산다.  왜 그럴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판검사, 의사, 교수가 된 사람들도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고 습관대로 살기 때문이다. 그 프로그램을 고치지 않는 한 엄마 아빠처럼 걱정하고, 화내고, 스트레스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윤회한다고 하는 것이다. 윤회란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가 아니고(이것은 인도의 힌두교 믿음일 뿐) “대를 이어 습관대로 산다”는 의미다.

그래서 우리는 “대를 이어 습관대로 살려면” 아이들이 싸우든가 말을 듣지 않으면 “하지 마” 하고 간섭하고, 매를 들고, 누가 잘못했는지 시시비리를 가리고, 겁을 주거나 벌을 주면서 살면 된다. 돈을 많이 벌어 좋은 교육을 해 출세를 시키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주위에 그렇게 된 사람을 보라. 그 사람들은 행복한지? 그 사람들도 습관대로 살 뿐이다. 순간순간 알아차려 깨우친 사람이 아니라면 판검사나, 의사, 교수,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고 습관대로 살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싸우거나 말을 듣지 않을 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아이 두뇌에 어떤 신경망을 만들어 주는 것이 좋을까?” 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점이 정말 중요하고 이에 따라 교육 방법이 결정된다. 나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으로 키웠으면 한다. 그래야 실패해도 좌절하지 않고, 남에게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하지 마” 하고 간섭하고, 싸움을 말리고, 시시비비를 가리며, 겁을 주고, 벌을 주는 식의 대처 방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들더라도 아이가 대를 이어 습관대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면 부모의 반응은 달라져야 한다.

아이 두뇌는 태어날 때 생명 유지 기능을 담당하는 뇌간은 완성되어 태어나지만,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로부터 전두엽에 이르기까지 자라면서 만들어진다. 태어날 때는 똥오줌만 못가라는 것이 아니라 시각중추도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보지도 못하고, 물론 운동신경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 걷지도 못한다. 두뇌가 안 갖추어져 있으면 걷지도 못하는데, 걷지 못하는 아이를 두고 겁을 주고, 매를 든다면 걸어질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안와전전두엽이 만들어져 있지 않으면 인내심이 없고, 거울 세포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니 공감 능력도 없으며, 전전두엽이 발달하지 않았으니 판단력도 엉망이다. 인내심이나 공감, 판단력도 자라면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지는데 부모들은 참지 못하고 판단력이 없는 아이에게 매를 드는 것처럼 대처한다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싸우거나 말을 듣지 않는 아이의 문제는 아이의 문제가 아니고 부모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하루에도 수십번씩 싸우고 이렇게 싸우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육아의 과정은 인고의 과정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인 동시에 부모가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내가 이런 글을 적는 것은 내는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당시는 뇌과학도 모르고  두뇌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도 모르고 키웠다.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홀로 서울에서 어디에 물어볼 곳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천지를 모르고 단지 젊은 용기 하나로 헤쳐나간 것 같다.

육아 이야기만 나오면 큰애에게 미안한 생각이 든다.  8월 더울 때 태어났는데, 산모 몸조리를 위해 방을 덥게 했다. 아기 엄마가 시장에 다녀오겠다고 해서 아기를 보고 있는데 자꾸 울었다. 순하다고 소문난 아이인데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멈추지 않아 그냥 울도록 버려두었는데, 나중에 보니 온몸에 붉은 반점이 나 있었다. 급히 병원에 데려가니 너무 덥게 해서 그렇다며 의사가 “이렇게 무식한 부모가 어디 있나?” 하고 핀잔을 주었다. 참 천지도 모르는 초짜 부모였다. 그래도 잘 자라 주어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다.

아이들이 일어서고 걷고 기저귀를 가리는 것은 그것을 담당하는 두뇌 신경망이 형성되었다는 의미다. 아이들이 싸우고 말을 듣지 않는 상황도 신경망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내 아이가 사회에 나가 갈등을 해결해 나가게 하려면 싸울 때 가능하면 자기들끼리 해결하게 부모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  좋은 공부 기회이기 때문이다. 보고 있으려면 울화통이 터지지만 개입하지 않고 참아야 한다. 그래서 아이들 싸움이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고 부모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다.

몸싸움이 벌어져 위험하고 꼭 개입해야 할 시점이라면 그때 단호하게 “그만” 하면서 기선을 제압해서 행동을 멈추게 해야 한다. 그리고는 타임아웃을 적용하여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그래서 타임아웃 방법을 “생각의 의자”라고도 한다). 이때 한 명씩 따로 다른 방으로 데려가서 화가 났음을 상기시키고(아이들 자신이 화가 나 있음을 알아차리게 해야 한다), 공감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어떤 싸움도 당사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이때 부모가 재판관이 되어 시시비리를 가려서는 안 된다. 들어주고 공감해 주어야 한다. 한 명씩 차례(순서는 형부터 한다거나 가위바위보 등으로 결정)로 따로 불러 들어주고 공감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부모의 사랑이 전해져야 한다. 그래서 부모 역할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다.

한 사람씩 불러  공감을 해 준 후에는 자신들끼리 해결하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아이에게 고생을 시키지 않겠다는 부모는 자식을 멍청이로 만들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모가 화해를 시키는 것도 좋은 공부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공감으로 부모의 사랑을 확인한 아이들은 대부분 언제 그랬나 식으로 다시 어울려 논다. 그냥 지켜보고 있으면 된다. 다시 자기들끼리 어울려 놀면 크게 칭찬해 주어야 한다. 인간은 보상을 통해 신경망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자란다. 싸우거나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면 자동 반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에게 “어떤 신경망을 만들어 줄 것인지” 생각해 보고 대응해야 한다. 그런 신경망을 만들려면 그에 맞는 빅데이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초보 바둑 기보로 아무리 훈련해도 이세돌을 이기는 알파고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내 아이가 어떤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생각해 보고 그에 맞는 육아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우리 아이가 고통의 윤회를 반복하게 둘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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