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내”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출세도 해야 하고, 그래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평생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고 행복하게 살려고 애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서 이러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해 보거나 의심해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내”가 아픈 곳 없이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칼에 손가락이라도 베이면 죽을 것같이 아프다. 그런데 손에서 팔로 올라오는 신경을 마비시키면 아픔이 사라진다. 손가락 상처는 잘린 그대로인데 왜 아픈 곳이 없어질까?
통증은 두뇌가 만든 것이다. 이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상처 입은 곳에서 두뇌로 정보가 전달되고 그 정보를 전달받은 두뇌는 통증을 만들어 관심을 두도록 한다. 다친 손을 모르고 내팽개치면 이 몸은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두뇌는 해당하는 곳에 신경을 써서 보호하도록 만든다. 이처럼 통증은 두뇌가 만든 것이다. 손가락이 아픈 것이 아니라 두뇌가 아픔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불변의 “내”가 있고, 이런 “내”가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상은 내 두뇌로 해석한 것이다. 강아지를 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눈을 통해 강아지의 윤곽, 색깔 등이 시각중추로 들어오고, 귀를 통해 강아지 소리가 청각중추로 전달되며, 손을 통해 촉감이 두뇌로 전달되고, 코를 통해 냄새가 후각중추로 전달된다. 시각중추로 전달된 강아지를 형성하는 가로선, 세로선, 색깔 등은 각각 별도로 처리되어 축약(Abstraction)되면서 강아지라는 모델로 표현되고 여기에 청각중추에서 분석된 울음소리, 후각중추에서 처리된 강아지 냄새, 촉각에서 처리된 강아지의 촉감 등이 통합되면서 강아지라는 하나의 표현형에 매핑되는 것이다. 강아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강아지를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해석할 신경망이 없기 때문이다.
2005년 영국의 로드리고 퀴로 박사는 영화배우 제니퍼 애니스턴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밝혀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그 영화배우의 사진으로부터 들어온 시각의 윤곽, 색깔 등 각종 정보가 단계적으로 처리되어 최종적으로 하나의 표현형으로 매핑되는 신경세포가 있다는 이야기다.
“나”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가 각각 시각중추, 청각중추, 후각중추, 미각중추로, 촉각중추로 들어와 몸(Body Map)이라는 표현형을 만들고, 여기에 내장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와 기억, 나의 특성(성격)을 만드는 두뇌 신경망이 통합되어 “나”라는 하나의 표현형으로 매핑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처리 과정에 잘못이 일어나면 성격이 달라지기도 하고(피니어스 게이지의 경우처럼), 신경망이 아직 덜 형성되었거나 크게 고장이 생기면 “나”라는 것이 없어지기도 한다. 18~24개월 이전의 신생아는 “나”와 환경을 구분하지 못하고, 코타르 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내가 없다”고 한다. “나”란 것이 두뇌가 만든 것이기 때문에 두뇌의 정보처리 과정에 잘못이 생기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같이 두뇌가 “나”를 만드는 과정에 착오를 일으키면 이상한 현상이 생기기도 한다. 고무손 실험이라는 것이 있는데, 감각을 착각하게 만들면 고무손을 내 손으로 착각한다(유튜브에서 고무손 실험을 조사해 보라: https://youtu.be/rRNpbs3LEK8). 환상지 환자는 실제 손이 없는데 손이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모두 두뇌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불변의 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불변의 나”라는 것은 없다. 생존을 위해 두뇌가 “나”라는 것을 만들고, 두뇌가 미성숙하거나 망가지면 “나”라는 것이 변형되거나 없어지기도 한다.
“나”란 두뇌가 만들었다고 하면 그럼 “나란 무엇인가?” 하고 되묻는다. 그런데 왜 “나”란 것이 꼭 있어야 하나? 개체 및 종족 보존을 위해 두뇌가 “나”라는 것을 만든 것일 뿐이다.
우리는 “내”가 존재하고 “내”가 출세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도 된다. 그런데 이런 “내”가 출세하여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데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마치 손바닥은 있으면 좋겠는데 손등은 없었으면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두뇌가 “나”와 환경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환경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될 때도 있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경우도 많이 있다. 돈이나 권력이 있으면 계속해서 행복할 것 같지만 돈이나 권력으로 바꿀 수 있는 환경은 아주 미미하기 때문이다.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면 좋겠지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뇌가 “나”라는 것을 만드는 한 “나”는 고락(고통과 쾌락)은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은 피할 수 없는데 죽음이 나와 무관한 것처럼 산다. 혹시 죽음 이야기가 나오면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눈치를 준다. 그러다가 막상 죽음이 임박하면 살려고 발버둥 치다 속절없이 간다(죽는다). 그런데 “나”란 두뇌가 만든 것이고 두뇌가 망가지면 당연히 사라지는 것이다. 고장 난 알파고가 “내 죽는다”고 난리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단지 “나”란 것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불변의 “나라는 것에 집착하여 거기에 갇혀 살 필요는 없다. “나”란 두뇌가 만든 것이고 두뇌가 망가지면 사라지는 것인데 “내”가 좀 실수하면 어떻고, 없어지면 어떤가? 상대가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나 말에 “내”가 자존심 상해 힘들어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살다 보면 때로는 비가 오는 날도 있는데 “나”는 운이 없다고 자책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터널을 지날 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낙담할 필요는 없다. 터널은 끝나게 마련이다.
세상은 자연의 법칙에 따라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그냥 알아차림에 머물면서 평온하게 지내면 안 될까? “불변의 나”란 것이 없는데, “나”란 것에 갇혀 살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두뇌는 순간순간 “나”라는 것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기 때문에 고락을 피할 수 없다. 그런 “나”라는 것에 갇히지 말고 그냥 알아차림에 머물러라. 또 “나라는 것이 발동하여 그 속에 갇혀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만 하여라. 그러면 언제나 평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