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는 바둑을 잘 둔다. 이제 인간 최고수인 이세돌도 인공지능인 알파고를 이길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알파고는 훈련된 대로만 프로그램을 수행한다. 알파고는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한다는 의미다. 알파고는 바둑에서는 최고이지만 환경이 바뀌어 운전해야 한다면 무용지물이 된다.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한다면 바뀐 환경에서는 오동작하기 마련이다.
우리 인간도 대부분의 경우 두뇌에 프로그램된 대로 산다. 오감을 통해 신호를 받으면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고(느끼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리고 작화한다. 자기 말이나 행동에 대해 자기합리화한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렇게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면서도 자기가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착각한다. 우리는 슬퍼서 운다고 생각하지만, 두뇌를 촬영해 보면 울어서 슬프다고밖에 할 수 없다. 슬픈 소식을 들으면 눈에 눈물이 나게 하는 운동중추가 먼저 동작하고 나중에 슬프다고 인식하는 전전두엽이 동작한다.
자식이 장난감을 갖고 놀다가 내버려 두면 제자리에 갖다두라고 이야기했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 두세 번 이야기해도 말을 듣지 않으면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른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아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4~5살 먹은 아이가 정리정돈이 무엇인지, 왜 제자리에 갖다 두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왜 화가 날까? 내가 이야기하면 말을 들어야 한다는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고 말을 듣지 않아서 그랬다고 자기합리화(작화) 하는 것이다.
마누라가 만든 음식이 싱거워서 짜증이 난다. 매번 음식이 싱겁다고 이야기했는데 오늘도 싱거워서 짜증이 나고 잔소리를 하다 말다툼이 벌어진다. 음식이 싱거워서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이것도 프로그램된 대로 동작하고 작화한 것이다. 세상은 자기 두뇌로 해석하기 때문에 마누라 입맛에는 싱거운 것이 아니라 입맛에 맞는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간을 맞춘 것이다. 마누라도 자신의 습관대로 간을 맞춘 것이고 이 습관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살기 바빠서 사실 남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온종일 같이 있으면서도 어떤 옷을 입었는지 알지 못하고 머리 스타일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나는 남이 어떻게 볼까 걱정이 되어 수십번 헤어스타일을 고치고, 이 옷 저 옷 고르느라 바쁜 출근 시간에 정신이 없다. 두뇌 프로그램된 대로 반응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프로그램된 대로 산다는 것은 습관대로 산다는 이야기이고 그 프로그램 속에 갇혀 사는 것이다. 프로그램된 대로 산다는 것은 인공지능처럼 산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대부분 인공지능처럼 무의식적으로 살면서 빈 곳을 채워 작화(자기 합리화) 한다.
프로그램된 대로 살면 에너지 소모가 적게 드는 장점이 있지만, 때로는 적절히 반응하지 못해 손해를 보거나 괴로워진다. 두뇌가 아직 미성숙한 아이를 꾸중해 봐야 나만 화가 나고 아이에게는 불안감만 조성할 뿐이다. 싱거운 음식에 간장을 조금 더 넣어 먹으면 되는데 짜증을 부려봐야 부부 사이만 벌어지고 하루 기분만 잡칠 뿐이다. 화장이나 옷 고르는데 지나치면 회사에 지각하거나 쓸데없는 데 돈만 낭비하여 나중에 꼭 필요할 때 돈이 없어 괴로워질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남편이 돈을 적게 벌어와서 그렇다고 자기합리화한다. 남편이 일부러 적게 벌어오려고 노력한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는 지경에 이르면 인생이 힘들고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거나 마누라의 말 한마디에 화가 난다. 화가 나면 맥박이 빨라지고 얼굴이 붉어지며 숨이 가빠진다. 이런 생리현상(F/F: Fight/Flight)은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생명이 위험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F/F 반응은 밀림에서 호랑이를 만나면 도망가거나 사생결단으로 싸울 때 몸을 준비시키는 방법이다. 위기상황에서 힘 빠진 상태로 있은 놈은 다 죽고,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거나 도망간 원시인의 후손이다. 그래서 우리는 위기상황을 맞으면 생리적으로 F/F 반응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호랑이가 나타나는 밀림 환경에서는 생명을 보존하는 아주 유용한 기능이지만 도시의 아파트같이 호랑이가 나타날 일도 없는데, 마누라의 말 한마디에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끼는 것은 분명 오동작이다. 환경은 완전히 바뀌었는데 두뇌는 아직 원시사회의 기능이 그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환경이 바뀌면 변한 환경에 맞게 반응해야 한다. 이렇게 원시사회에 맞게 만들어진 신경망으로 현대사회를 살면 바뀐 환경에 적절히 반응하지 못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 이제까지의 습관대로 산다.
이처럼 습관에 갇혀 살면 고통이 따른다. 주위에 온통 제사를 지내는 사회에서 갇혀 살면 제사를 벗어날 수 없다. 먼저 제사를 지내지 않는 선진국을 경험해봐야 제사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깥세상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순간순간 알아차려야 갇히지 않을 수 있다.
프로그램된 대로, 습관대로 살지 않으려면, 즉 갇혀 살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바뀐 환경에 대한 경험이 필요하다. 담배로 폐암에 걸려 죽어가는 친구의 고통을 경험해 보면 담배를 피우는 것의 심각성을 알 수 있고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다. 이렇게 결심해도 담배를 끊기 어렵다. 담배를 끊으려면 담배를 피우려 손이 나가는 그 순간에 담배를 피우려 하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즉 알아차려야 담배를 피우는 프로그램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알아차림(의식)이 있어야 인간이 알파고와 다를 수 있고, 바뀐 환경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고, 변할 수 있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인간도 알파고와 마찬가지로 프로그램된 대로 살 뿐이다.
인간이 프로그램된 대로 살지 않으려면 먼저 프로그램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경험이 있어야 하고, 두 번째로 사건이 발생하는 그 순간에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전자는 다양한 경험이 있어야 함을 의미하고 후자는 알아차림 연습(이를 알아차림 명상 혹은 위파사나라고 함)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을 하라고 하고, 알아차림을 연습하라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