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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 공화국의 민낯

JungTae Lee 0

인공지능을 앞세운 4차산업혁명으로 사회가 서서히 바뀌고 있었는데, 코로나 사태로 우리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렇게 사회가 급변하니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잘나가는 그룹, 판사, 검사, 의사, 목사와 같은 사자 그룹들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소위 선진국이라는 미국, 영국에서는 하루 확진자가 수만 명에 이르고 있고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나가 시신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런 와중에서도 부자는 별문제가 없는데 치료받을 수 없는 실직자나 노숙자는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라고 해도 쓰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네가 왜 간섭이냐” 하는 식이다. 한마디로 “당신의 생명보다 나의 자유가 더 중요하다”는 식이다.  개인의 자유도 다 “산 이후의 문제”인데, 이들이 “우리가 그동안 본받고 싶어 하던 선진국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서민들은 마트에서 음식을 훔치다가 징역을 살기도 하는데 회사로부터 수백억을 횡령한 검사는 무죄가 되기도 하고, 성범죄는 엄벌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도 검사의 성범죄는 그냥 넘어간다. 검사가 술대접받은 사건에서 아가씨 팁은 빼고 술값을 n 등분하니 965,000원으로 100만 원 이하이니 그냥 넘어가는 사건을 보고, “100만 원 미만의 맞춤 술집”이라는 개그를 보면서 검찰개혁이 왜 절실한 일인지 알겠다.  그런데 이런 관습에 익숙한 세력은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 간의 다툼으로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 또다시 검찰개혁을 저지하려고 한다. 급기야 최종 인사권자이며 “선출된 대통령”의 결재도 “시험으로 걸린 판사”가 뒤엎는 것을 보고 이들의 카르텔이 보통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이들은 “우리는 고시라는 어려운 과정을 거친 선택된 사람들”이니 검찰개혁이니 사법개혁이니 그런 것 하지 말라는 것 같이 들린다.  즉 자기들은 수백억을 횡령해도 문제가 안 되고, 성범죄를 저질러도 괜찮으며, 퇴직하여 변호사로 전관예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니 손대지 말라는 소리로 들린다.

최근에 ” 위기의 민주주의”라는 브라질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았다. 우리처럼 막강한 권력을 가진 검사와 판사가 선출된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대통령선거에 개입하여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증거도 없이 뇌물죄로 감옥에 보내고(우리나라 논두렁 시계 사건처럼), 자기들 입맛에 맞는 사람을 걸리게 하는 “법으로 일으킨 쿠데타” 이야기였다.  이렇게 가진 자들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코로나로 서민들이 죽어 나가도 방관하는 것을 볼 때 남의 나라 이야기 같지 않고,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저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을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교인들이 선하고 우리 사회에서 착한 일을 많이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코로나 걸려서도 막무가내로 도망가서 대구 코로나 대유행을 일으킨 신천지는 이단이라고 치자. 광복절에 데모를 주동하고, 모임을 자제하고 마스크를 써달라고 해도 이를 무시하여 2차 코로나 사태를 일으킨 사랑제일교회 전광훈 전 한기총 회장과 일부 목사들은 아직도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도 다른 사람의 생명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 있는 사람이면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과연 이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니면 종교를 빙자한 또 다른 욕망의 군상들인지 의심스러웠다.

의사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평소에는 우리의 병을 고쳐주는 고마운 사람들 정도로 생각했는데 의사협회 지도부의 막말이나 공공의료 반대 데모 사태를 거치면서 의사에 관한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나라보다 자기들 밥그릇이 중요하기는 판검사나 마찬가지다. 집사람의 혈압으로 내과에 들렀는데 이 의사는 나이도 한참 어린데 환자 이야기는 아예 듣지도 않고 자기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대놓고 화를 내었다. 집사람이  허리가 아파  몇군데 병원에 들렀는데 의사마다 이야기가 달라 혼란스러워 인터넷에 조사하여 공부했다. 외국에는 2차 소견(Second Opinion)이 상식인데 한 신경외과 의사는 다른 병원에 다니며 Doctor Shopping 한다고 노골적으로 나무라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 대해 아는 의사와 이야기 중에 “의사는 친절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인간이 물건도 아니고 마음먹기에 따라 몸이 영향을 받는데 어떻게 신뢰가 가지 않는 의사가 병을 잘 치료할 수 있을까? 의사들도 “우리는 전교 1~2등 하던 수재들이고 오랜 공부를 한 사람들이니 당연히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갇힌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우리는 공부 지상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식들이 버릇이 없어도 좋고 공감 능력이 없어도 다 좋으니 오직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래서 소위 S 대 출신들과 사회생활을 해보면 자기중심으로 사회가 돌아가지 않으면 힘들어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초중고에서 전교 1~2등 하니 모두가 좋아하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든 들어주니 그런 습관이 몸에 밴 것 같았다. 최근에 사회 사건에 대해 S 대 학생들의 이야기라고 언론에 나오는 것을 보면 공감 능력이 많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시험으로 뽑힌 사람이 머리가 좋고, 영어-수학-국어 중심의 시험으로 머리가 좋다는 것을 결정한 것이 정당할까? 두뇌에는 영어-수학-국어 말고도 운동, 공감 등을 담당하는 무수히 많은 영역이 있다. 언어를 담당하는 언어중추만 머리에 속하고 손흥민처럼 운동중추가 발달하여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머리가 나쁜 사람일까? 데레사 수녀님처럼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머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머리가 좋다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조선 시대에는 붓글씨로 시를 잘 쓰는 사람이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다. 미래에 인공지능이 통역하는 시대에도 영어로 뽑은 사람을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할까? 이런 시대에는 공감 능력이 영어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공감 능력이 부족한 판사, 검사, 의사, 그리고 목사들을 볼 때, 그들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갈 인재라는데 동의하기 어렵다. 시대변화에 맞게 이들이 가진 권력 제도도 고쳐가야 한다. 검찰과 법원도 개혁하여 견제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권리만 있고 책임지지 않는 사법제도는 바뀌어야 한다. 의료정보가 독점될 수 없는 시대에 공감 능력이 부족하고 친절하지 못한 의사는 도태되도록 의료제도도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이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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