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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파하지 말고, 아파하는 나를 알아차려라.

JungTae Lee 0

우리는 이 몸이 “나”이고, 불변의 “내”가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실은 “나”란 두뇌가 만든 것이고 가변적이다. 

“나”란 것이 존재하려면 “나”와 “세상”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는데, 18~24개월 미만의 신생아는 “나”와 “세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리고 코타르증후군에 걸린 사람은  “내”가 없다고 한다. 두뇌가 미성숙하면 “나”란 것이 없고, 두뇌에 고장이 생기면 “나”란 것이 없어진다는 의미다. 즉 “나”란 것은 두뇌가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두뇌에는 Body Map(Body Scheme)이라는 것이 있다. 누가 내 몸에 손을 대면 즉시 어느 부분에 손을 댓는지 알 수 있고, 어느 부분에 상처라도 생기면 그 부분에서 통증을 느낀다. 두뇌의 운동중추와 감각중추에 몸의 해당 부분에 대응하는 지도를 가지고 있어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란 것은 이런 Body Map에 자신의 특징(성격)이 추가되어 “주관적인 나”로 인식되는 것이다. “나”란 이와같이 두뇌가 만들었기 때문에 두뇌 신경망에 변화가 생기면 “나”라는 것도 바뀔 수 있다. 가변적인 것이다. 

고무손 실험이란 것이 있다. 책상에 앉은 피험자에게 칸막이를 설치하여 한 손은 보이게, 다른 쪽은 고무손만 보이게 한다. 그리고 붓으로 보이지 않는 손과 고무손을 동일한 방법으로 자극을 주면 점차 고무손을 자신의 손으로 착각하게 된다. 이때 고무손을 망치로 내리치면 마치 자신의 손이 맞은 것처럼 깜짝 놀라게 된다. 즉 고무손을 신체의 일부로 인식하는 것이다. 중풍으로 두뇌 감각중추와 운동중추에 손상을 입은 사람은 해당하는 손에서 오는 감각을 처리할 수 없음으로 마치 그 손이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행동한다. 이처럼 우리의 신체적 자아도 가변적이다. 

이런 신체적 자아에 자신의 특징이 추가되어 주관적인 “나”로 인식한다. 그래서 누가 이런 자아를 무시하거나 상처라도 주면 프로그램된 대로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한다. 아파트 경비원이 인사하지 않으면 무시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지고, 회사 동료가 험담하면 화가 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자아를 불변의 “나”로 인식하며 산다. 이런 “나”가 남보다 앞서야 하고, 돈을 많이 벌어 출세해야 하며, 경쟁에서 이기려고 악을 쓴다. 그러다 무시당해 괴로워하고 남 보다 뒤처져 화가 나고, 상처 입고, 병들기도 한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양한 정보를 입력받는데 “나”라는 필터(” 나”를 만드는 신경망의 동작)를 통해 자신에게 맞는 정보를 걸러낸다. 그래서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외국의 공항에서 온통 영어로 하는 말은 들리지 않다가 저 멀리 한국 사람의 이야기는 잘 들린다. 거실에 걸린 벽시계 소리가 평소에는 들리지 않다가 알아차림에 머물고 있으면 인식된다. 최근 정부의 원자력 정책에 대한 검찰 수사는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이 갔다. 그런데 몇 년 전에는 4대강 정책을 두고는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이 갔다. 이처럼 우리는 자기 특성을 가진 신경망으로 정보를 처리(필터링)하고 작화(자기 합리화)한다.  

이렇게 신경망이 동작하여 만들어진 ” 나”는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니, 이기적 자아로 분리되고, 파편화되고, 고립된다. 즉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세상을 만들면서 우리가 사는 터전인 지구는 서서히 병들어가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란 두뇌가 만든 것이며 가변적이다. “나”를 만드는 신경망에 이런 특징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런 신경망의 동작을 약화시킬 수가 있다. 경비원이 인사를 안 해서 기분이 상한 그 순간에 알아차리면 “오늘 마누라와 싸웠나 봐”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화가 난 그 순간에 알아차리면 “무슨 사연이 있겠지” 하고 넘어갈 수 있다. 갑자기 막무가내식으로 끼어든 자동차 때문에 화가 치민 자신을 알아차리면 “많이 바쁜가 봐” 하고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자신에게 이런 특징이 있음을 알아차리고 해당 신경망의 동작을 약화시키고 또 약화시키면 “나”란 것이 가벼워진다. ”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는 신경망의 동작이 약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희미해지는 등산로같이 되는 것이다.  

“나” 를 만드는 신경망의 동작이 약화될 수도 있지만, 그냥 동작하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그냥 알아차림에 머물면 된다. 이처럼 알아차림에 머물면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 “알아차림”만 남는다. 이 상태에서는 신호를 걸러내던 “나 라는 필터” 가 작용하지 않아 더 많은 신호를 인식할 수 있고 따라서 더 지혜로워질 수 있다. 알아차림에 머물고 있으면 벽시계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뜨거운 물에 손가락을 데었다면 손가락이 아파진다. 찬물에 손을 넣고 약을 바르는 등 치료를 한다. 이때 온통 내가 아파할 수도 있지만 아파하는 나를 인식하는 그 “알아차림”에 머물러 보라. 아픔이 아주 가벼워진다. 아픔도 신경망의 동작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해당 신경망의 동작에 집중하여 다른 신호나 생각을 모두 필터링하면 해당 신경망의 동작이 강화되어 더욱 큰 통증을 느끼지만, 알아차림에 머물면서 해당 신경망의 동작을 약화시키면 통증이 줄어든다. 아플 때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먹거나 영화를 보면 통증도 모르고 지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때는 통증 회로 대신에 다른 미각과 시각 신경 등이 동작하여 통증 회로가 약화된 점이 다르긴 하지만…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아파하지 않고 아픈 나를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신경망의  통증회로를 활성화하지 않음으로써 약화시키는 방법이다.

알아차림에 머문다는 것은 다양한 가능성에 문을 열어두는 것이다. 알아차림에 머물면 서로가 분리되지 않음으로 협력하게 되고 갈등이 줄어 평온해질 수가 있다. 

우리는 불변의 “나”란 것이 존재하여 세상을 좁은 필터로 인식하여 분리되고 파편화되고 공멸하는 길로 갈 수도 있지만, “나”란 것을 줄이고 열린 알아차림에 머물면 서로 협력하고 공존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열린 알아차림에 머물려면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해서 두뇌 신경망의 동작을 바꾸어야 한다. 나아가  “나”란 것을 알아차려 관련 신경망을 약화시키고,  결국에는 알아차림에 머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래야 “나”란 것에 갇혀 살지 않고, 열린 의식, 알아차림에 머물 수 있다. 

“나”란 것은 두뇌가 만든 것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바꿀 수 있다. 고정된 ” 내”가 경쟁에서 이겨 출세하려고 파편화되고, 고립되고, 사는 터전을 황폐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알아차림에 머물면서 협력하고 공존하면서 평온하게 살 수도 있다. 어떤 ” 나”로 살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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