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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렇게 해야 하나? – 효에 대한 단상

JungTae Lee 0

옛날 요양원 봉사를 다닐 때의 일이 생각난다. 어떤 노인들은 숨 쉬는 것 말고는 눈만 멀뚱 떠 있을뿐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무지 반응이 없다. 자식도 못 알아보고, 물론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 때마다 “내가 저 지경이 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보곤했다.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오직 연명치료에만 사용되는 비용이 선진국의 경우 국방비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 투자를 하면 미래 나라의 역군이 되어 나라를 지키기도 하고 세금도 내어 나라에 도움이 되겠지만, 내일에 대한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노인들에 대한 부담이 사회문제화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면 “그럼 부모를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대책이 없다는 이야기다. 

내가 어릴 때에는 집에서나 학교에서 효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삼강오륜으로부터 시작하여 제사, 장례 등에 대해서도 각인이 될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3년상은 기본이고 빈소를 차려두고 매일 공양을 올렸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옛날에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산소 옆에 움막을 지어놓고 3년상을 재냈다”는 이야기를 아쉬운듯이 했다. 당연히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해 안타깝다는 의미였다. 만약 어떤 사람이 3년상을 지내지 않으면 인간말종으로 모든 사람의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들어가면서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는 직장 문화가 도입되었다. 바쁜 출근시간에 공양을 올리는 사람이 점차 줄어 들더니만 지금은 이렇게 아침마다 공양 올리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졌다. 요사이는 이렇게 하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을까?

제사는 지극정성으로 지내야 한다고 교육을 받았다. “조율이시”라는 제사지내는 법을 진리인양 받들면서 살던 시대에 제주도 여행가서 호텔에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기사를 보고 “그렇게 지내느니 차라리 지내지 말지” 하고 생각했다. 나는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서울에서 울산까지 내려가고 저녁 12시에 제사를 지내고 새벽같이 서울로 올라와 출근하던 생각이 난다. 어떤 경우에는 한달에도 여러번 이런 생활을 하다보니 월급을 교통비로 다 쓰고 월급받은 지 5일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돈이 바닥이 나기도 했다. 그 때는 이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고 진리라고 생각했는데 요사이 이렇게 사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요사이는 제사를 모아 한꺼번에 지내고 그것도 저녁에 지내기도 한다. 옛날 사고방식으로는 세상이 망할 일이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끼리 약속의 문제다. 형제끼리 의논하여 한꺼번에 지내도 되고 저녁에 지내도 된다. 3년상이 아니라 3일만에 화장하여 흩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한다고 상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인간말종으로 고립되지도 않는다. 

얼마전에 딸집에 갔는데 마침 집사람이 감기몸살로 고생을 했다. 저녁에 퇴근해 온 딸 아이가 아픈 엄마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녀들 밥챙겨주지 않았다고 불만이었다. 자기 자식들만 챙기는 딸을 보고 “뭐 저런놈이 다 있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지난 날의 나를 뒤돌아 보니 딸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나도 내 아들이나 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데리고 갔지만, 엄마가 아프다고 하면 “늙으면 다 그런데” 하고 생각했다. 엄마가 평소에 나가는 양로원에서 관절염에 만병통치약이라는 약병을 들고 와서 사 먹었으면 했다. 한번만 먹으면 무릎이 싹 낫는다는 약을 들고 와서 얼토당토 않은 가격이라 사기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같으면 엄마 말에 공감하면서 사 드렸을 것 같다. 두말하지 않고…

인간이 진화해 오면서 종족보존 기능은 두뇌 깊이에 프로그램되어 있다. 우리는 그런 조상의 후손이다. 그래서 자식을 돌보는 기능은 가르치지 않아도 한다. 동물도 그렇다. 개나 소, 모든 동물은 자식을 돌본다. 자기 자식을 돌보지 않는 인간은 짐승 수준도 못되는 인간이다. 

그러나 동물 중에 부모를 돌보는 동물은 없다. 인간이 유일하다. 그래서 효는 교육을 통해 대뇌피질에 프로그램되어야 한다.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가 한집에 사는 대가족제도하에서는 효가 필요한 개념이다. 집안을 유지하려면 질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식도 결혼하면 분가하는 사회에서 효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대가족사회에 적용한 효를 강요하려면 여자들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제사를 지내거나 3년상을 지내거나 연명하는 부모를 봉양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한다. 내 딸이 그렇게 희생 당하며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의 효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노인들끼리 만나면 재산을 죽을 때까지 가지고 있어야 자식들의 효를 받을 수 있으니 명심하라고 한다. 말은 맞을지 몰라도 효를 돈으로 사겠다는 생각이라 동의하기 어렵다. 내 친구는 부자 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마누라를 멀리 고향에서 부모 모시게 두고 혼자 부산에서 직장에 다녔다. 그 며느리가 노인들이 빨리 죽기를 바라지 않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효를 했을까? 한 친척은 부모가 90이 넘었는데 70이 넘은 아들에게 제산을 물려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70이 넘은 아들이 사업을 하겠는가? 그 돈으로 무엇을 더 하겠는가?

아는 지인은 주말이면 부모님이 손자가 보고 싶어 전화를 한다고 했다. 아들은 사업하느라 주말이면 골프 약속 등이 있는데, 부모님 전화가 올 때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못 간다고 말씀드리기가 정말 힘든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손자 보고 싶다고 전화하는 것도 생각해 보고 해야할 것 같다.

친구들 만나면 자식이 장가를 안 가서 걱정이고 손자를 낳지 않아서 걱정이라는 푸념이다. 그런데 한 친구는 손자 둘을 봐 주다가 마누라가 건강을 잃어 서울 생활를 청산하고 촌으로 이사를 했다. 세상은 급격히 변해가고 있는데, 옛날의 결혼 풍습, 대를 잇는 개념, 제사, 장례, 효 등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 유지해야할까? 제사나 장례에 대한 것은 많이 변했는데 결혼, 효, 대를 잇는 개념은 아직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처음 사회에 진출하여 결혼하고 아이낳아 기르려면 힘이 든다. 이 때 친구는 부모가 도와주어 집도 장만하고 잘 사는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한 나는 비교가 되어 불만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주위에 보면 집을 사 주거나 손자를 키워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고부 갈등이 심하다. 부모가 자식에게 간섭하기 때문이다. 돈을 저렇게 헤프게 쓰면 안 되는데, 밥은 해 먹지 않고 계속 사 먹기만 하니 아들과 손자 건강이 걱정이다. 그래서 이것 간섭하고 저것 간섭하다 보니, 나중에는 원수같이 되어 버린 경우를 자주 본다. 

자식은 부모 간섭을 받지 않으려면 자립해야 한다. 도움을 받으면 간섭은 필수적으로 따라 온다. 아껴 번 돈을 헌금할 때도 내 돈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 관심을 같게 된다. 자식이 힘들면 도와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이지만, 힘들게 번 돈을 가져가서 헤프게 쓰는 자식에게 당연히 간섭하려고 할 것이다. 간섭 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면 자립이 기본이다. 

3년상도, 제사도, 효도도 우리끼리 약속이다. 세상이 바뀌면 사회에 맞게 약속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다. 자립할 수 있으면 간섭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고 자립할 수 없으면 도움을 받고 간섭도 각오하며 살아야 한다. 

늙어 자식도 알아보지 못하고 송장이나 마찬가지의 노인들을 연명에 많은 비용이 들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고령화사회를 고려할 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러나 부모인데 효를 해야지 않겠는가?  두뇌에서 해마가 퇴화하면 기억력이 감퇴한다. 대상회가 약해지면 사고전환이 잘 안되기 때문에 고집에 세어진다. 그러다 전전두엽이 망가지기 시작하면 판단력도 퇴화되고, 참을성도 없어진다. 두뇌는 뇌간에서 변연계, 대뇌피질 순으로 발전하고, 후두엽에서 전두엽측으로 발달하는데 퇴화할 때에는 이의 역순으로 진행된다. 그러다 감각도 이상해지고 시력도 희미하고, 나중에 가서는 변연계가 퇴화하면 감정도 영향을 받는다. 이 정도에 이르면 생명은 유지가 되지만 두뇌의 입장에서 보면 쥐새끼처럼 감정처리도 그 수준에 그친다. 뇌간은 동작하여 생명현상은 유지되지만 변연계도 퇴화하여 감정처리도 잘 안된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두뇌는 동물 수준으로 퇴화된 것이다. 그래도 내 부모인데 하는 생각은 백번 이해가 되지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많은 희생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문제가 더 커지면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나오지않겠는가? 

나는 젊어서 간섭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려면 자립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늙어서도 마찬가지다. 노인이 되어서도 경제적으로 독립적으로 살 수 있고,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립하여 살 수 있으면 아무리 늙어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남의 도움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누구의 희생을 전제로 해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 그 이전에 내 생을 마무리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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