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태어나면 걸음마부터 시작하여, 말과 글을 배우고, 학교에 가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공부한 후에,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아서 키워 공부시키고, 결혼시키고 나면 환갑에 이른다. 그러다 정년퇴임을 하면, 완전히 다른 생활패턴에 들어가게 된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이 때가 인생의 황금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자유 말이다. 먹고 살기 위하여 주어진 시간에 짜증나는 출퇴근을 안해도 되고, 조직에서 요구하는 일을 안해도 된다. 특히 꼴보기 싫은 사람을 안 만나도 되고, 여행을 가도 사람들이 없으니 대접 받으며 다닐 수 있고, 점심 특선이라 해서 산 값에 맛있는 음식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는 눈이 점점 침침해지고, 무릎이 아파 멀리 갈 수가 없고, 몸 여기저기가 불편해 온다. 몸은 이와같이 날로 쇠퇴해지는데 정신은 늙어가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두뇌의 동작에서 나오는 정신에는 늙음이 없다. 생각같아서는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최종결정권은 정신이 아니라 몸이 가지고 있다.
80이 가까워지면 걷기가 힘들어지고 90이 넘으면 셔츠를 갈아입는 하찮은 일에도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요일 감각도 가물가물해지고 시도 때도 없이 졸기도 한다. 누구라도 만나면 따라다니며 이야기를 한다. 사람이 그리워서다. 고독 말이다.
그러다 암이나 뇌졸증과 같은 큰병에 걸리면 살려고 사투를 벌린다. 한평생 의료비의 70%이상을 이 때 사용한다고 한다. 의사는 살려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만약 노인이 죽기라도 하면 의사는 실패라고 생각하고 가족은 의사에게 책임을 따진다. 운좋게 살았더라도 먹는 것부터 똥오줌에 이르기까지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 병원비로 벌써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은 가족들은 처음에는 엄마 아빠가 애처롭지만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부담스럽다. 바쁜 회사생활에 부모님만 돌보고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돌보미를 두기에도 경제적으로 감당이 안되어 요양원으로 보내게 된다.
요양원에 간 부모는 정신이라도 없는 상태라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으면 지옥이 될 수도 있다. 평소에 이런 삶을 절대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했건만 하루하루가 지옥같은 삶을 이어가게 된다. 이런 상태가 되면 착한 딸 하나가 가장 큰 보험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운이 좋은 사람이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자식들은 큰 짊을 덜었다는 홀가분한 기분이고 장례식에서 슬픈 표정을 짓는다. 죽은 고인과 아무런 인연이 없는 문상객은 빈소에서 웃으면서 세상이야기를 하고, 화장터에서 우리 인생은 한 줌의 재가 되어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간다.
자식은 부모가 살던 아파트를 정리해야하는데 시간이 없다. 그래서 겨우 하루 시간을 내어 부모님댁에 들러 통장과 귀중품을 챙기고 유품정리사에게 전화하여 부모님 아파트 유품 처리및 청소를 부탁한다. 그런데 평소에 우리는 그렇게 쓰레기가 될 물건을 하나라도 더 사려고 발버둥친다.
여기서 많은 의문이 생긴다.
환자는 양로원에서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지내는 삶을 원할까? 의사는 환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이나 해 볼까? 그냥 노인환자가 죽는 것이 의료의 실패일까? 어느 시점이 되면 죽을 권리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여기저기 낡아 수습도 불가능한 몸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인도적일까? 자연스러운 죽음은 어떤 것일까?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이라 하는데 우리는 죽음 이야기가 나오면 기겁을 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이런 가족들과 대화가 가장 어렵다고 한다. 평소에 자연스럽게 죽음 이야기를 나눈 가족들은 마지막 단계를 넘어가는 것도 가장 지혜롭다고 한다.
사회 분위기처럼 노인을 폄하하는 편견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그러면 젊은이들의 인생도 비참하게 마무리하도록 미리 예약해 두는 것이 아닐까? 노인들이 많아 이 사회가 노인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면 바람직할까?. 그러면 해결책은? 등등
이 책에서는 노인들이 경멸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젊은이도 자신들의 인생이 비참해지도록 예약해 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좋은 이야기이지만 초고령사회가 됨에 따라 노인들이 이 사회를 좌지우지 하는 현실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얼마 전에 전철을 타고 가는데 어떤 노인이 젊은이 앞으로 가서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고 호통을 치다가 젊은이에게 봉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어쩌다가 우리 노인은 사회로 부터 추하고 피하고 싶은 편견의 대상이 되었을까?
개인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하면 걷지도 못하고 그냥 두면 굶어 죽을 자식을 애지중지 이렇게 키워준 부모들이 노인세대인데… 사회적으로 볼 때도 보리고개, 옥수수 급식, 전쟁, 독재 등으로부터 세계적으로도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든 주역이 부모세대이고, 노인세대인데 이렇게 피하고 싶은 편견의 대상이 된 것은 문제다. 이것은 사회 관습으로 정착된다면 지금의 젊은이도 추하고 경멸의 대상이 될 인생을 미리 예약해 두고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노인이 되면 대부분의 경우 욕심에서 좀 벗어날 수 있고, 오래 살아 온 경험이 있기 때문에 좀 더 지혜로워질 수 있다.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이런 지혜를 경청하면 나중에 후회할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전후세대는 1년에 100만명 이상 태어났는데 올해 태어날 애기는 30만명 이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노인은 너무 많고 이를 부양할 손자들은 너무 부족하여 젊은이들의 미래가 불안해질 것이다.
나이가 들면 두뇌가 노쇄해지고,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 그래서 변화를 싫어하고 보수적으로 된다. 이런 노인이 많지 않을 때에는 사회적 조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는데, 이제 초고령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노인의 인구가 40%에 육박하기도 한다. 그래서 국가 정책이 노인들에 의해 좌우되고, 젊은이는 뼈빠지게 일해서 세금을 내는데 자신들의 삶이 어렵기만 하니 노인들에 불만이 쌓여가기만 하는 것 같다.
내가 대학교수로 부임하기 얼마되지 않아 정년을 6개월 정도 둔 노교수님들이 신임교수 채용에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학과를 마비시키다 시피한 사건을 보았다. 그 때 내 생각이, 정년퇴임 후에는 아무 관계가 없을 일인데 왜 저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래 사회는 우리 자손을이 살아갈 세상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선택은 젊은이들에게 맡겨두고, 노인들은 존경받는 위치에 머물고, 선거에는 나서지 않고 양보하는 것이 좋겠다. 늙은이는 투표권을 반환하고 존경의 대상으로 남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독서 메모]
- 노인이 가장 괴로운 것은 노인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다. 노인에 대한 편견이다.
- 편견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것을 창피해 하는 사람은 이미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을 시작한 것이다. 자신의 편견을 인지하지 못하면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노인에 대한 편견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늙음을 고칠 대상으로 생각하는 의료인도 마찬가지다.
- 사람의 일생에서 노년기만큼 개인차가 큰 시기도 없다. 노인들의 삶에는 개인차가 엄청 크다. 그리고 개인마다 삶이 다르다.
- 청력이 떨어지는 노인은 인지장애가 3년쯤 더 빨리 찾아온다.
- 노년기를 잘 보내기 위한 필수품으로는 1) 우월한 유전자, 2) 행운, 3) 두꺼운 지갑, 4) 착한 딸 한명 이다.
- 저자 아버지가 죽기 직전의 상태를 더 연명 했더라면 그것은 고통과 두려움, 무료함과 무력감 뿐인 여생이 되었을 것이다. 애꿎은 고통에 시달리면서 목숨만 부지할 뿐, 원치 않는 삶을 그저 부지할 뿐, 원치 않는 삶을 그저 버터갈 뿐이다.
- 초고령기란 삶의 안락함도 주체성도, 사는 의미나 즐거움도 전혀 남아 있지 않는 인생의 종점이나 마찬가지다.
- 초고령기에, 무미건조한 하루하루가 무기한 이어지는 긴긴 세월을 당신은 어떻게 견디겠는가? 이상 기후에, 인구 과포화까지 겹쳐 각종 문제로 온 동네가 몸살을 앓고 있는 이 행성에서, 한정된 자원, 일자리, 배우자 등등을 두고 한층 격해질 경쟁에 인류는 대비가 되어 있는가?
- 이미 천수를 누리고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이 있다. 이 노인의 생을 연장시키는 것이 과연 옳을까? 과학은 이런 고민도 없이 오직 하루 더 연명시키려고만 한다.
- 누군가 살면서 할 일을 다 했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어떨 것인지 뻔히 예상될 때, 끝낼 시점을 스스로 정할 권리가 당사자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른바 수동적 안락사를 허용해야 하지 않을까?
- 정정한 노인은 누구나 스스로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죽어가는 노인은 맘대로 죽어갈 권리를 줄 필요가 있다.
- 여기 저기 닳아 쇠하고 온 삭신이 쑤신다.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고 어린애도 비웃을 몸동작이 최대의 도전과제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계속 고통스럽게 삶아 있어야 하나?
- 80대가 되면 걷는 것도 힘들어진다. 90이 가까우면 셔츠만 갈아입어도 숨이 차 온다.
- 90이 되면 횟수를 세다가 잊을 정도로 온종일 꾸벅꾸벅 조는 게 일이다. 또 80대에는 식사량이 확연히 줄어들지만 90대에는 생각날 때만 먹는다.
- 누군가 집배원이 오는지 안오는지로 요일을 짐작하고, 24시간 중 대부분을 자는데 쓴다면 십중팔구 그의 일상은 개미 새끼 한마리 얼씬 하지 않고 어느 누구와도 말 섞을 일이 없는 고독한 날들의 연속이 된다.
- 의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입에 올리는 걸 기피한다.
- 간혹 어떤 집은 환자 본인도, 보호자도 죽음을 논하는데 거부감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런 환자를 돌보는 것이 참 좋다.
- 죽음을 말하는 것을 회피하기만 하면 망상만 키우게 된다. 최고의 의술 앞에서 죽음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라는 집단 최면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례가 없이 오늘날 서양 의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만 목격되는 기현상이다.
- 늙으면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다. 내 영혼은 여전히 새로운 경험에 목마르고 받아만 준다면 어디든 뛰어들려고 한다. 그러나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 안타까운 사실은 최종 결정권을 쥔 것이 마음이 아니라 몸이라는 사실이다.
- 70년을 살든 80년을 살든 몸뚱이 안의 나는 젊은 시절 그대로라고 느낀다. 나는 그대로인데 몸뚱이만 변해가는 것이다.
- 노년기가 꿈직한 것은 나이만 먹다가 죽을 운명이라는 사실 때문이 아니다. 늙어가는 과정이 쓸데없이, 그리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우며 고독하기 때문이다.
-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젊은이든 늙은이든 하나같이 현재의 자신 그대로가 아니고 꾸미고 바꾸어서 다른 인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이다.
- 사람은 누구나 좋은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이런 좋음을 젊음에 국한하는 것은 처음부터 실패를 정해 두고 인생을 출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우리가 노인 편견에 굴복한다면 어느 순간 낙오자인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당연지사다. 이건 다 자업자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