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가?”, “왜 취직을 하려고 하는가?”,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하고 물어보면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오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그런다”고 한다. “왜 돈을 벌려고 하는가?” 물어보면 “집을 싸려고 그런다”고 하고, “왜 집을 싸려고 하는가?” 하고 물어보면 “내 집이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서 그런다”고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최고의 선”이라고 했다.
이런 것도 행복해지는 한 가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집이 없던 사람이 집을 사면 처음에는 행복감을 느낀다. 내 방에 들어갈 때마다 전제집을 전전하던 기억에서 온화한 행복감이 엄습해 오고, 이사로 승진한 부장은 복도를 지나가는 부하 직원이 인사할 때마다 출세한 내가 실감이 나서 입가에 행복의 미소가 번진다.
우리는 행복이 어떤 조건이 성취되면 얻어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내 집이라는 조건이 성취되면 그 때부터 행복해지고, 승진이라는 조건이 성취되면 그 때부터 행복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순간 순간 변하는 두뇌의 동작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조건이 만족되면 결과적으로 얻어지는 그 무엇이 아니다.
조건에 따른 행복은 일시적이다. 집을 사면 평생동안 행복감을 느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6개월 정도 지나면 내 집이란 생각도 들지 않고, 평수가 넓은 친구집에 가면 좁은 우리집이 짜증스럽다. 승진 후 1년 쯤 지나가면 인사하는 부하보다 고개를 들고 모른채 지나가는 부하가 더 짜증스럽다.
행복도 두뇌의 동작이다. 행복한 사람의 두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보상중추가 활발하게 동작한다는 점이다. VTA (Ventral Tegmental Area)를 중심으로 한 보상중추가 동작할 때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런데 문제는 보상중추가 하루 24시간 계속해서 동작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7일 조금도 쉬지 않고 보상중추가 동작하는 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다.
우리 두뇌는 오감을 통해 외부 자극을 받아들여 자신의 기대(여기서는 Reference라고 하자)와 비교하여 만족되면 보상중추가 동작하고, 그렇지 못하면 편도체와 같은 신경망이 동작한다. 따라서 보상중추가 동작하여 행복감을 느끼려면 외부 자극이 자신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있어야 하는데, 외부에서 입력되는 자극은 내가 원하는대로 조절할 수가 없다.
시각정보는 눈을 통해 두뇌에 들어 오는데, 언제나 내가 원하는 정보만 들어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세상은 그렇게 동작하지 않는다. 세상을 내가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그 많은 자극 중에서 돈으로 조절할 수 있는 극히 일부밖에 없다. 라면을 먹는 대신에 산해진미 정도로 바꿀 수는 있지만 그것도 아주 일시적으로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조금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다른 곳을 보게 된다.
청각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세상에서 나는 소리중에서 내가 원하는 소리만 존재할 수 있겠는가? 길을 가다보면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도 들어야 하고, 속이 뒤틀린 친구의 욕설도 들어야 하고, 마누라의 잔소리도 들어야 한다.
세상은 내가 원하는대로 바꿀 수가 없다. 바꿀 수 있다고 해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은 세상의 법칙대로 돌아갈 뿐이다. 내일 소풍간다고 비가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비는 자신의 법칙에 따라 올 뿐, 나의 기대와는 상관이 없다. 마누라의 잔소리를 안 들었으면 하는데, 마누라는 자신의 습관대로 행동할 뿐, 나의 기대와는 상관이 없다.
이와 같이 세상은 내가 바꾸기 어려운데, 이것을 내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니 결국 보상중추가 동작했다가 편도체가 동작했다가 하는 동작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즉 세상을 바꾸어 내가 행복하겠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행복과 괴로움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와 같이 보상중추가 동작하여 느껴지는 행복을 쾌락이라고 한다. 우리가 쾌락을 행복으로 착각하고 추구하면 행복감을 느끼다가 고통스러웠다가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 억지로 보상중추 동작을 유지하려고 하면, 마약 흡입과 같이 자신을 망가뜨리게 된다.
우리 두뇌는 뇌간과 변연계 그리고 대뇌피질로 구성되어 있는데, 뇌간은 우리의 생명현상을 관장한다. 즉 심장을 뛰게 하고, 체온을 36.5도로 유지하며 수분을 70%로 유지한다. 한편 변연계는 감정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여기에 보상중추도 있지만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편도체도 있다. 우리가 아무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강도를 만나면 심장이 뛰고 호흡이 빨라지고, 다리에 힘이 들어간다. 이런 역할을 제어하는 부분이 편도체로, 위기상황에서 공포감을 느끼고 그 위기를 탈출하는데 적합하도록 몸을 바꾼다. 이런 위기상황은 잠시 겪다가 위기가 지나면 원래상태로 돌아오면 생존에 아주 유용한 기제이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이런 부분이 동작하면 스트레스를 받고 괴로워진다.
행복을 앞서 설명한 쾌락으로 정의한다면 고락(고통과 쾌락)을 반복할 수 밖에 없지만,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가 조용하면 어떨까? 즉 괴로울 때 동작하는 편도체도 동작하지 않고, 어떤 외부 환경에서도 변연계가 조용하다면 어떨까? 이것이 바로 괴로움이 없는 상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어떠한 외부 자극에 대해서도 Reference와 비교하여 변연계가 조용하다면 언제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변연계가 조용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외부 자극은 내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기 때문에 Reference를 줄이면 된다. 아주 나쁜 외부 자극이 들어와도 비교할 Reference가 적다면 변연계가 동작하지 않는다. 따라서 쾌락의 행복감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비교 대상인 Reference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Reference는 내 몸의 이미지인 Body Map과 나의 특징을 나타내는 신경망의 합이다. 내 몸에 상처를 입으면 괴로운 것은 두뇌가 Body Map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특징이 추가된 것이다. 따라서 덕지덕지 붙어있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라는 특징이 많으면 많을수록 평온함을 유지하기 어렵다.
행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속적인 출세도 있지만 이렇게 얻은 행복은 쾌락과 고통을 반복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고통이 없고 언제나 평온한 지복 상태를 유지하려면 내 두뇌에서 Reference로 동작하는 신경망을 고쳐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특징을 나타내는 신경망을 줄이고 줄여, 거의 동작하지 않는 상태로 만들면 감정을 담당하는 변연계는 언제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Reference로 동작하는 신경망을 줄이면 되지만, 이런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이를 실현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 두뇌는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신경망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동작하기 때문이다. 신경망의 동작에 대해 “순간순간 알아차림”이 없으면 고치기 어렵다. 그래서 행복은 습관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